Sunday, April 08, 2007

大リーグ放映権

◇第1回 ヤンキース入りした松井秀が、「ボクがメジャーに行ったら、イチローさんみたいに試合を中継してくれますか?」
(05/08/01)抜粋:日刊ゲンダイ連載【立花孝志 大リーグ中継の内幕】

3年前のオフ、松井秀喜がヤンキースへの移籍が決まったあと、NHKの関係者にこう言ってきたそうだ。NHKは現在、年間約300試合の大リーグを中継している。大リーグの試合はNHK、フジテレビ、TBS、BSi、BSフジ、スカパーが放送権を持つ。 BSに関してはNHKが30球団のうち14球団のホームゲームの放送権を優先的に取れる。

地上波の放送権は30球団の主催試合をNHKと民放2社できっちり3等分しているが、NHKが選んだ10週間分のゲームを優先的に中継できることになっている。 NHKはア・リーグ、ナ・リーグ30球団の中からイチローや松井秀など日本人選手がいるチームをピックアップする。それから日本でもなじみのある球団を取る。イチロー(マリナーズ)、松井秀(ヤンキース)、野茂(現ヤンキース3A)などがア・リーグ球団に属しているため、どうしても同リーグの試合が多くなる。

さらに放送権を持っていない残り16球団のホームゲームの中から、20試合を中継できる。これをワイルドカードと呼んでいる。 残り16球団のホームゲームはBSではBSiとBSフジが放送権を保有している。ヤンキースやマリナーズがビジターに出た試合をNHKではなく、民放の地上波あるいはBSが放送するのはそのためである。 

大リーグは1球団年間162試合を戦う。主催試合は81。ワイルドカードを除く、14球団のホームゲームだけでも1134試合の放送権をNHKは持つ。 松井秀喜がヤンキース入りした2003年には年間334試合を中継した。松井秀喜の心配は杞憂だったのである。それでも800試合以上は中継せずに“捨てて”いる。もったいないので、フジやTBSにまた売りをしたらどうかと提案したこともあったが、受け入れられなかった。ちなみにその年の日本のプロ野球の中継試合は149。 NHKがこれだけ大リーグ中継に力を入れるのは野茂の1年目の活躍で衛星放送の受信契約数が飛躍的に伸びたからだ。その後、マグワイアとソーサの本塁打記録争い、イチローや松井秀喜の活躍が追い風になり、受信契約を伸ばした。 それではNHKは放送権料として一体、いくら払っているのか。

◇第2回 海老沢会長が激怒して放送権料が年間36億円が25億に
(05/08/02)抜粋:日刊ゲンダイ連載【立花孝志 大リーグ中継の内幕】

年間約25億円。これがNHKが払う大リーグの放送権料である。5年契約が切れたため、2004年に契約を更新。それまでの約2倍で5年契約を結んだ。 それでも当初の契約交渉の段階では金額は約36億円だった。もともと大リーグ中継の放送権は電通がMLB(大リーグ機構)から購入。それをNHK、TBS、フジ、BSi、BSフジ、スカパーの6社に販売する。03年限りで契約が切れるため、電通は年間約36億円の5年契約で放送権を買った。前回の3倍である。

それをNHKに売り込んだのだが、当時のNHKの海老沢会長の逆鱗に触れたと聞いた。というのもBS放送が開始した直後、NHKの関連会社であるMICOがMLBとPGA(米プロゴルフツアー)の両者と直接交渉を行おうとしたからだ。代理店を介在させなければ、より安く放送権を購入できると考えたからだ。ところがそれまで両者の放送権を持っていた電通が「MLBだけはウチに放送権を残してほしい」とNHKに泣きを入れたという。そして電通に放送権を譲った経緯がある。それが突然、3倍のカネでの契約延長の話。昔の恩義を忘れたのか、と激怒した海老沢会長(当時)は「メジャーリーグの中継なんかしなくてもいい!」とまで言ったと聞くが、結局、電通の関係者が海老沢会長の自宅前で土下座して陳謝。 

海老沢会長は「2倍以上は出せない」と値下げを要求。電通側が受け入れ、前回の約倍の年間約25億円で妥結したのである。民放の放送権料はNHKの10分の1くらいだと聞く。だからこそ前回書いたように、NHKが優先的に中継できる球団、試合を指定できるのである。さて電通は36億円で売るはずのメジャーの放送権が25億円でしか売れなかった。NHKは大助かりだが、電通にとっては大きな損失だ。ところが電通はそれを逆手にとって新たな商売、収益源を生み出した。それがNHKの大リーグ中継にも波紋を招くことになる。それは一体なにか。


◇第3回 NHK中継に民間企業CMが映るカラクリ
(05/08/03)抜粋:日刊ゲンダイ連載【立花孝志 大リーグ中継の内幕】

テレビ視聴者にしか見えないバーチャル広告なのだが前回、NHKの大リーグの放送権料が当初の年間約36億円から、約25億円にダウンして契約した話をした。MLB(大リーグ機構)から放送権を購入した電通としては、単純に計算しても約11億円の差損が出る計算だ。ところで大リーグの中継ではバックネットの下のフェンスに、日本の民間企業の広告が映ることがある。実際のメジャーの球場にはない看板広告だ。テレビの試合中継にかぶせて映っているだけで、テレビ視聴者にしか見えないものである。

いわゆるバーチャル広告だ。実はあれが約11億円の差損と関係がある。約11億円の差損が生じることになった電通はその代わりに、NHKが放送する試合の事前通告とバーチャル広告の了解を取り付けた。すなわち、NHKが中継する試合を事前(1カ月前)に連絡してもらい、それに合わせて企業からバックネット下の広告を取るのである。

その際、米国のテレビ局が中継する試合をそのまま流すのでは広告は入らない。大リーグの試合を中継する米国のテレビ局は、MLBI(大リーグ機構インターナショナル)にも映像を流す義務がある。その映像をMLBIは世界各国、各地域に流すのだが、その段階で電通は募集した企業の広告をゲームの画面にかぶせる。もちろん、MLBIの許可を取ったうえでのことである。中継の最中にNHKのアナウンサーが、「これは大リーグのアジア向けの放送をそのまま流しているため、広告が映っております」と言っているのはそのためだ。 NHKで全国放送される影響は大きなものがあるのだろう、電通はそのバーチャル広告で差損を上回る収入をあげているとも聞いている。

NHKには一銭も入らないのだが、バーチャル広告が入ったから放送権料も安くなったという考え方もできる。 大リーグ中継に限らず、スポーツと企業スポンサーは今では切っても切れない関係にある。その両社の関係を考えさせられる出来事でもあった。

◇第4回 大リーグの年間放送権料は高いのか?
(05/08/05)抜粋:日刊ゲンダイ連載【立花孝志 大リーグ中継の内幕】

大相撲・Jリーグ・プロ野球に比べて、NHKの大リーグの年間の放送権料が約25億円であることは以前書いた。他の競技と比較するとどうなのか。例えば大相撲は年間30億円、Jリーグは19億円、ウィンブルドン・テニスは約8億円、米プロゴルフツアーは約15億円、プロ野球は巨人戦の1試合1億7000万円を含め、約35億円である。メジャーの放送権料が高いか安いかは、関心を持つ度合いにもよろうが、製作単価だけをみると実は安上がりなのである。昨年NHKは大リーグの試合を311試合、中継した。1本当たりの製作単価は1時間で473万円。大リーグはアメリカから映像が送られてくるからだ。

日本のプロ野球やJリーグなどの試合を放送するには、現場に中継車を出し、アナウンサーや技術部員などスタッフを派遣。独自の映像を作らなければならない。メジャーリーグ中継では、送られてくる映像にかぶせて実況や解説は必要だが、現場にスタッフや機材を出すことはまずない。同じ野球でもプロ野球では製作単価は1時間当たり1096万円と倍以上かかるし、国内プロゴルフはさらに高く2301万円になっている。これはゴルフが野球やサッカーなどより、カバーする場所が広いからだ。ちなみに米ゴルフツアーは976万円と国内ゴルフの半分以下だ。逆に土俵を中心に映している大相撲のそれは838万円とプロ野球より低くなっている。 しかも大リーグ中継はサッカーなどに比べ、1本当たりの放送時間が平均3時間と長い。さらに地上波、BS、ハイビジョンの一体化放送をしていることもメリットになっている。

私が入局した20年前に比べ、NHKの収入は約倍の約6800億円にアップしている。それには大リーグ中継が寄与しているのは間違いない。 ちなみに今週末から始まる高校野球甲子園大会は夏、春とも放送権料はゼロである。 大リーグ中継の話はこれでひとまず終わりとさせていただきます。ご愛読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Thursday, April 05, 2007

「公共放送の在り方問う」 受信料不払い訴訟で弁護団

NHK受信料不払い問題で東京の弁護士10人が4日、支払い督促に異議を申し立て、東京地裁、簡裁で裁判が続いている3人の依頼を受け弁護団を結成した。都内で開いた記者会見で「不祥事や政治家との関係で国民の信頼を裏切り、契約に違反した」と述べ、公共放送の在り方をめぐってNHKと全面的に争う姿勢を示した。

弁護団の沢藤統一郎弁護士は「NHKは信頼に応える放送、報道をするのに対して、視聴者が受信料を支払うという関係が放送法の趣旨だ」と指摘。その上で「信頼を損なっても解約できない契約は無効とも言える。公共放送が何によって成り立つかを正面から問う重大な裁判だ」と訴えた。

依頼した3人はいずれも都内の30代の男性。カラーテレビ受信契約を結んだが、約4万1000円-5万3000円の支払いが滞っているとして督促を受けた。相次ぐ不正経理などの不祥事や番組内容への不満などを理由に異議を申し立てているという。(2007年4月4日 18時55分,共同)

Wednesday, April 04, 2007

동북아시아의 시민공론장과 저널리즘

강상중 교수(도쿄대학)

오늘 강연의 세 가지 키워드는 동북아, 공론장(public sphere), 저널리즘이다.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등 일본의 일반적인 전국 신문들은 동북아시아라는 말 대신 북동아시아라는 말을 사용한다. 한국이나 북한, 중국에서 동북아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다. 왜 그러는가? 북동아라는 말은 동북아에 대한 영어표현인 'Northeast Asia'를 직역한 것인데, 영어표현 'Southeast Asia'를 남동아라고 하지 않고 동남아라고 부르는 것과 비교된다. 이것은 일본의 저널리즘이나 학계가 동북아 지역을 태평양 건너편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의 시각을 통해 이 지역을 바라본 것이다. 오늘은 미국 문제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미국의 그늘이란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적개심, 불안, 적의에 의해 형성되는 '공적인 문제'

일본의 저널리스트와 연구자들은 일본 언론의 북한 보도 행태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일본의 미디어 현상을 얘기할 수 없다. 과거 북한에 대한 보도는 엄청난 것이었고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으로 지금도 막대한 문제가 있다.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가장 큰 문제는 '공적인 것'이 위축되거나 혹은 변질된다는 것이다. 세계화는 단순히 경제, 금융,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공적인 것으로서의 정치가 없어지고, 위축되고, 축소되고, 변질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1998년 바우만(Z. Bauman)이란 학자는 <정치의 발견(In search of politics)>이란 책에서 흥미로운 사례를 소개했다. 형기를 마친 아동 성범죄자가 어떤 지역에 들어왔다. 그 지역은 혼란에 빠졌고, 지금까지 공적인 발언을 한 적도 없고 관심도 없었던 한 주부가 그 지역의 평화를 위해 전투적으로 활동했다는 얘기다. 그 주부의 활동은 불안, 증오심, 가족애 등에 따른 것이었고 그것이 정치적인 정체성을 형성했다. 공적인 문제를 긍정적, 적극적인 요인이 아니라 적개심, 불안 등 부정적인 요인을 통해 확립해 간다는 것이다. 바우만은 거기에 언론이 개입되면 자유로운 언론 공간이 없어진다고 주장했다.

일본에서의 북한 보도도 마찬가지다. 일상적인 가족 사랑과 국가적인 공동체가 연결이 돼서 폐쇄적인 보도가 확립된 게 아닐까 한다. 즉 내적인 불안을 부추기는 결항성과, 적국을 만들어내는 집단국가가 생겼을 때 자유로운 언론 공간은 너무 쉽게 소멸되는 하나의 사례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반일적인 보도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불안, 증오, 적의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지렛대로 해서 공적인 것이 확립되어 갔을 때 아주 강한 압력과 대립이 성형성된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생활을 통해 알 수 있다.

냉전의 불완전한 붕괴

교토(京都)대학의 야마구라 시이치라는 동아시아 전문가의 말을 빌린다면 동북아 지역은 세 가지 단층으로 나눌 수 있다. '관계(nexus)로서의 동아시아', '역사로서의 동아시아', '미래를 향한 프로젝트로서의 동아시아'가 그것이다. 관계로서의 동아시아는 분명 현재의 동북아와 관련된 것이다. 그렇다면 동북아는 어디인가? 여러 이론이 있지만 경제적으로만 보자면 일본, 한국, 중국대륙, 경우에 따라 대만과 몽골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그러나 나는 6자회담으로 대표되는 6개국을 동북아 지역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본다. 즉 남북한과,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협의의 동북아는 역시 한중일 3국을 지칭한다. 3개국은 세계 경제 안에서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다. 동남아를 포함해 동아시아에서의 무역은 유럽연합(EU)에 비견될 정도로 커졌다. 외화의 이동, 인적·물적 이동, 학술의 이동, 문화의 이동 등은 실체적으로 EU 통합에 필적할 만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지역에는 여전히 국가의 로컬리티가 남아 있고 국가간 대립은 경제·기술·문화의 교류와 비대칭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대중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한류(韓流), 일류(日流), 화류(華流)가 있지만 한편에서는 혐한(嫌韓), 혐중(嫌中), 반일(反日)이 있다. 이렇게 보더라도 다양한 관계, 넥서스가 있는 한편으로 그에 대한 일종의 안티테제가 있다. 이런 가운데 이 지역에 제대로 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나. 어떤 아이덴티티를 형성할 것인가.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그것은 냉전의 붕괴라는 것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국가와 민족으로 분열·대립되고 내전의 상처가 있는 이 지역에서 하나의 틀이 붕괴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완전히 붕괴된 게 아니라 형태를 바꿔 가치와 행동과 문화의 패턴을 형성하고 있는 요인이 여전히 남아 있다.

기억의 인터페이스를 구축하자

둘째, 역사로서의 동아시아는 이 지역이 EU 및 서유럽과 다른 것은 역사의 무게가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전을 했던 분단국가가 현존하고 있다. 역사를 둘러싼 반목도 있다. 1995년 <타임>지가 '역사의 전쟁은 끝났나'라는 특집에서도 일본이 어떻게 역사와 싸우고 있는지에 대한 기사를 썼다.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종군위안부, 오키나와, 남경대학살 등을 둘러싼 역사 문제가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의 역사 문제, 한국에서의 베트남전 문제 등과도 관련이 있다. 한·중·일이라는 국가의 단위로 봤을 때 역사라는 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역사가 어떻게 기록되고 있고, 어떤 식으로 국가적 정체성과 역사가 형성됐는가, 역사의 기억에 대한 공유가 가능한가 등을 한국의 대학과 시민사회, 저널리스트들과의 관계를 통해 심화하고 기억의 인터페이스를 구체적으로 공유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의 전쟁에 대한 기억, 그 가운데서 오키나와 전쟁에서 싸우던 이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상처입은 사람들, 중국에서 상처입은 사람, 동아시아에서 죽은 사람들은 입장이 매우 다르다. 과거 식민지 지배와 전쟁의 기억이 한국과 북한에 있어 어떻게 형성되고 변질되고 창조됐는가를 우리는 무릎을 맞대고 여러 형태로 논의할 수 있다. 그러면서 상호간 기억의 인터페이스를 확대하는 대학과 저널리스트와 시민사회의 연대가 가능하다고 본다. 이런 움직임이 작게나마 여러 사회단체에서 시도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6자회담의 새로운 의미

세번째는 동북아를 하나의 프로젝트로 생각하는 것이다. 프로젝트로서의 동북아를 생각했을 때 동북아는 로컬한(지방적인) 것과, 내셔널한(국가적인) 것과, 리저널한(동북아 지역적인) 것이 중층적으로 연계돼있다. 나는 규슈 구마모토에서 태어났다. 규슈는 한국과 중국의 관광객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상호 의존이 심화된 상태다. 규슈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면 부산, 서울, 상하이가 도쿄보다 가깝다. 그렇게 보면 로컬한 것이 인터로컬(지방간)하게 혹은 리저널하게 결부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인터로컬'로서의 동북아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내셔널로서의 동북아 즉 국가간, 국민간 관계로 나아가는 동북아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6자회담이다. 안보문제는 로컬한, 내셔널한, 리저널한 관점 모두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그것을 가장 첨예하고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6자회담이다. 우리는 국가간 관계없이 미래 논할 수 없다. 그러나 국가간의 관계에서만 미래를 논하는 것은 과거의 경험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국가는 만능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6자회담을 다자간 안보틀로 삼아야 하고, 그를 통한 상설기구가 만들어져 군비, 군축, 대량살상무기 상호관리, 신뢰조성 메커니즘을 위한 틀을 만들어야 한다. 최근 6자회담에서 나온 합의에는 5개의 실무회의 중에서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의 메커니즘을 논하는 실무회의가 있다. 나는 그런 프로젝트를 통해 현실이 그걸 따라가고 있는 걸 보면서 일종의 확신을 갖는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베트남전과 한국전쟁이라는 최대 규모의 준국제전쟁이 냉전 시기에 일어났다. 두 전쟁의 사망자만 해도 600~700만 명이고 미군도 1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한국전쟁에서는 정전협정이나 평화협정 없이 60년이 흘렀다. 독일, 서유럽과는 달리 이 지역에는 또다시 전쟁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 6자회담은 바로 이런 상태에 종지부를 찍고 다자간 안보틀을 형성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일본의 현실을 생각하면 국가의 행위와 여론에는 괴리가 있다고 본다. 국가의 현실주의와 여론의 비현실주의가 괴리를 나타내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굉장히 어려운 문제지만 6자회담의 귀추가 이 지역이 진정으로 동북아로서의 지역성을 발휘할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다.

둘째, 프로젝트로서의 동북아를 생각할 때 각국의 국민공동체가 분열하고 대립하는 게 아니라 동북아라는 지역 네트워크가 중층적이고 다원적으로 확산되는 프로젝트로 생각하고 싶다. 그같은 지역 네트워크가 보다 강화되고 동북아를 우리의 생활 현장으로 실감하게 되는 시대를 앞당길 수 있다면 동북아를 덮어온 내셔널리즘이라는 괴물은 더 이상 날뛰지 않고 새로운 지역통합의 시대로 나아갈 것이라고 기대해왔다. 그런 점에서 저널리즘의 의의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연대의 복원

저널리즘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매개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언론 공간에서 그 사회가 공유해야 할 과제를 발견하고 분석해 제시하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 발신할 것인가, 무엇을 발신할 것인가가 언론의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언론인들은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기사를 썼고, 무엇을 보도했고, 무엇을 조사했고, 언론인의 원칙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중국에서 '반일폭동'이 일어났을 때, 혹은 북한 보도에 대해 지방지나 통신사는 어떻게 보도했는가, 한국과 중국에서 보는 관점은 무엇인가 등 각각의 시각의 호환성과 원근법을 얘기함으로써 자신의 기준을 다시 행각하고 재편하는 것이 한중일 저널리스트들에게 필요하고, 가능하다고 본다.

결론은 진부하다. 프랑스 혁명에서 말하는 자유, 평등, 연대(박애)라는 게 있는데, 나는 연대가 가장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재작년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폭동을 알아보기 위해 2주간 프랑스에 간 적이 있었다. 이민자들이 차를 불태우는 폭동이 있었지만 그걸 보면서 느낀 것은 프랑스의 공화성을 지탱하고 있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것 중에서 연대가 결여됐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연대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일을 통해 달성할 것인가는 동북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대학과 저널리즘, 시민사회의 삼위일체를 통해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프레시안에서 옮김)

Monday, April 02, 2007

In Japan, a Historian Stands by Proof of Wartime Sex Slavery

By NORIMITSU ONISHI The New York Times, Published: March 31, 2007

TOKYO

IT was about 15 years ago, recalled Yoshiaki Yoshimi, a mild-mannered historian, when he grew fed up with the Japanese government’s denials that the military had set up and run brothels throughout Asia during World War II.

Instead of firing off a letter to a newspaper, though, Mr. Yoshimi went to the Defense Agency’s library and combed through official documents from the 1930s. In just two days, he found a rare trove that uncovered the military’s direct role in managing the brothels, including documents that carried the personal seals of high-ranking Imperial Army officers.

Faced with this smoking gun, a red-faced Japanese government immediately dropped its long-standing claim that only private businessmen had operated the brothels. A year later, in 1993, it acknowledged in a statement that the Japanese state itself had been responsible. In time, all government-approved junior high school textbooks carried passages on the history of Japan’s military sex slaves, known euphemistically as comfort women.

“Back then, I was optimistic that this would effectively settle the issue,” Mr. Yoshimi said. “But there was a fierce backlash.”

The backlash came from young nationalist politicians led by Shinzo Abe, an obscure lawmaker at the time in the long-ruling Liberal Democratic Party, who lobbied to rescind the 1993 admission of state responsibility. Their goal finally seemed close at hand after Mr. Abe became prime minister last September.

Mr. Abe said he would adhere to the 1993 statement, but he also undercut it by asserting that there was no evidence showing the military’s role in forcing women into sexual slavery. His comments incited outrage in Asia and the United States, where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is considering a nonbinding resolution that would call on Japan to admit unequivocally its history of sexual slavery and to apologize for it.

To Mr. Yoshimi, Mr. Abe’s denial sounded familiar. Until Mr. Yoshimi came along 15 years ago, the government had always maintained that there were no official documents to prove the military’s role in establishing the brothels. Mr. Abe was now saying there were no official documents to prove that the military forcibly procured the women — thereby discounting other evidence, including the testimony of former sex slaves.

“The fact is, if you can’t use anything except official documents, history itself is impossible to elucidate,” said Mr. Yoshimi, a history professor at Chuo University here.

The emphasis on official documents, according to Mr. Yoshimi and other historians, has long been part of the government’s strategy to control wartime history. In the two weeks between Japan’s surrender on Aug. 15, 1945, and the arrival of American occupation forces, wartime leaders fearing postwar trials incinerated so many potentially incriminating documents that the Tokyo sky was said to be black with smoke. Even today, Japan refuses to release documents that historians believe have survived and would shed light on Japan’s wartime history.

Although Mr. Yoshimi found official documents showing the military’s role in establishing brothels, he is not optimistic about unearthing documents about the military’s abduction of women.

“There are things that are never written in official documents,” he said. “That they were forcibly recruited — that’s the kind of thing that would have never been written in the first place.”

John W. Dower, a historian of Japan at the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said Mr. Yoshimi’s “extremely impressive” work has “clarified the historical record in ways that people like Prime Minister Abe and those who support him refuse to acknowledge.”

MR. YOSHIMI grew up in Yamaguchi Prefecture in western Japan, in a household with fresh memories of the war. He traces his interest in history to a junior high school lecture on the nation’s American-written, pacifist Constitution and its guarantee of human rights. He was impressed that the Constitution “even had something to say about a kid like me in the countryside.”

After completing his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Tokyo, Mr. Yoshimi concentrated on Japan’s postwar democratization. It was while searching for documents related to Japan’s wartime use of poison gas in the Defense Agency’s library that he first stumbled upon proof of the military’s role in sexual slavery.

Mr. Yoshimi copied the document but did not publicize his finding. At the time, no former sex slave had gone public about her experiences, and awareness of wartime sex crimes against women was low. But in late 1991, former sex slaves in South Korea became the first to break their silence. When the Japanese government responded with denials, Mr. Yoshimi went back to the Defense Agency.

Of the half-dozen documents he discovered, the most damning was a notice written on March 4, 1938, by the adjutant to the chiefs of staff of the North China Area Army and Central China Expeditionary Force. Titled “Concerning the Recruitment of Women for Military Comfort Stations,” the notice said that “armies in the field will control the recruiting of women,” and that “this task will be performed in close cooperation with the military police or local police force of the area.”

In another document from July 1938, Naosaburo Okabe, chief of staff of the North China Area Army, wrote that rapes of local women by Japanese soldiers had deepened anti-Japanese sentiments and that setting up “facilities for sexual comfort as quickly as possible is of great importance.” Yet another, an April 1939 report by the headquarters of the 21st Army in Guangzhou, China, noted that the 21st Army directly supervised 850 women.

Mr. Yoshimi went public by telling Asahi Shimbun, a national daily newspaper. The attention led to years of harassment from the right wing, he said, including nightly phone calls.

These documents had survived because they had been moved 25 miles west of central Tokyo before the end of the war, Mr. Yoshimi said. The postwar American occupation forces had then confiscated the documents, eventually returning them to Japan in the 1950s.

DESPITE the government’s efforts to hide the past, Mr. Yoshimi succeeded in painting a detailed picture of Japan’s wartime sexual slavery: a system of military-run brothels that emerged in 1932 after Japan’s invasion of Manchuria, then grew with full-scale war against China in 1937 and expanded into most of Asia in the 1940s.

Between 50,000 and 200,000 women from Japan, Korea, Taiwan, China, the Philippines, Indonesia and elsewhere were tricked or coerced into sexual slavery, Mr. Yoshimi said. Thousands from Korea and Taiwan, Japanese colonies at the time, were dispatched aboard naval vessels to serve Japanese soldiers in battlefields elsewhere in Asia. Unlike other militaries that have used wartime brothels, the Japanese military was the “main actor,” Mr. Yoshimi said.

“The Japanese military itself newly built this system, took the initiative to create this system, maintained it and expanded it, and violated human rights as a result,” he said. “That’s a critical difference.”

Mr. Yoshimi said he was unsurprised by the most recent moves to deny the wartime sex slavery. He said they were simply the culmination of a long campaign by nationalist politicians who have succeeded in casting doubt, in Japan, on what is accepted as historical fact elsewhere.

In 1997, all seven government-approved junior high school textbooks contained passages about the former sex slaves. Now, as a result of the nationalists’ campaign, only two out of eight do.
“Mr. Abe and his allies led that campaign,” Mr. Yoshimi said, “and now they occupy the center of political power.”

Wednesday, March 28, 2007

受信料義務化見送りでNHKが恐れる事態

J-CASTニュース, 2007/3/29

政府が今国会に提出する放送法改正案で、焦点だったNHK受信料の支払い義務化が見送られた。「受信料の義務化と値下げはセットだ」と2007年1月に発言して、NHKに約2割の値下げを迫った菅義偉総務相と、抵抗するNHKとの攻防は3カ月続いた。この戦いは、夏の参院選挙前に値下げを確約させたかった菅総務相と、悲願の受信料義務化を逃したNHKの“相打ち”で終わった。 ただし、NHK内には「義務化見送りで払わなくてよくなった」との誤解が広がるのでは、との不安が残った。

混乱の元は菅総務相の読み違い

受信料値下げをめぐる攻防で、菅総務相は、「絶対に欲しがるはず」と支払い義務化を打ち出の小づちのように振り回して値下げを迫った。その強硬姿勢に自民党内の一部から疑問の声が出たり、一時は放送法改正案の国会提出の見通しが立たなくなったりの混乱があった。菅総務相の強硬姿勢を支える読みは、NHKの「義務化は欲しいが、値下げを受け入れてまでのものではない」という認識との間に大きなズレがあった。

受信料の義務化問題はそもそも、04年夏に発覚したNHKプロデューサーによる制作費の横領事件を皮切りに、NHKの不祥事が次々と明るみに出て、受信料の不払いが広がったことから持ち上がった。不祥事発覚前は8割だった受信料の収納率が7割に低下した。

これを放置すれば受信料で支える公共放送の仕組みが崩れかねないとみた総務省が、法案に支払い義務化を盛り込む準備を進めた。06年12月には義務化による増収の試算がまとまり、菅総務相は「2割の値下げが可能」と確信を持ったとされる。
だが、NHKは強硬に値下げを拒否した。

「選挙目当てが見え透いている。2割値下げは菅総務相が急に言い出した。次の人になればどうなるかわからない。目先のことで何年も先までの約束はできない」 と、NHKのある幹部は警戒心をあらわにしていたという。

また、「義務化だけでは、値下げできるほど劇的な増収は見込めない」という現実的な判断もNHKにはあった。罰則を追加するわけでもなく、最も困難な転居情報の入手にも手間がかかる現状は何も変わらないからだ。

「義務化だけなら参院選挙は戦えない」

NHKの激しい抵抗を受けて、自民党内には「義務化だけなら参院選挙は戦えない」と、見送り論は早くから既定路線になっていた。議論の舞台となった同党の通信・放送産業高度化小委員会を切り盛りした片山虎之助委員長(参院幹事長)は「義務化は今回は見送るが、やらないということではない。引き続き検討して早い時期にやる」と強調する。だが、NHKが07年9月に新しい経営計画をまとめて値下げを発表するとしても、「その後に義務化法案だけ単体で提出できるのか」と疑問視する声も多い。

義務化が見送られたことに対してNHKは、「現状でも実質的に支払い義務はある。特に影響はない」と表向き平静を装っている。ただ、「義務化見送りで、払わなくていいと誤解されては困る」との声もある。

テレビを設置したらNHKとの契約を義務付けている放送法の現行規定はそのままなのだが、「契約義務もなくなった」などと曲解が広がれば、ますます受信料が支払われなくなる恐れもあり、まだまだ問題は尾をひきそうだ。

Monday, March 26, 2007

Why I am saying sorry for London's role in this horror

The state failure to issue an apology for a crime as monstrous as the slave trade diminishes Britain in the eyes of the world Ken LivingstoneWednesday March 21, 2007The Guardian

Next Sunday marks the bicentenary of the abolition of one of history's greatest crimes - the transatlantic slave trade. The British government must formally apologise for it. All attempts to evade this are weasel words. Delay demeans our country. Recalling the slave trade's dimensions will show why. Conservative estimates of the numbers transported are 10-15 million; others range up to 30 million. Deaths started immediately, as many as 5% in prisons before transportation and more than 10% during the voyage - the direct murder of some 2 million people.

Conditions imposed on survivors were unimaginable. Virginia made it lawful "to kill and destroy such negroes" who "absent themselves from ... service". Branding and rape were commonplace. A Jamaican planter, Thomas Thistlewood, in 1756 had a slave "well flogged and pickled, then made Hector shit in his mouth" for eating sugar cane. From 1707, punishment for rebellion included "nailing them to the ground" and "applying fire by degrees from the feet and hands, burning them gradually up to the head".

When in 1736 Antigua found there was to be a rebellion, five ringleaders were broken on the wheel, 77 burned to death, six hung in cages to die of thirst. For "lesser" crimes, castration or chopping off half the foot were used. A manual noted: "Terror must operate to keep them in subjection."

Barbarism's consequences were clear. More than 1.5 million slaves were taken to the British Caribbean islands in the 18th century, but by its end there were only 600,000. By 1820, more than 10 million Africans had been transported across the Atlantic and 2 million Europeans had moved. But the European population grew to 12 million while the black slave population shrank to 6 million.

If the murder of millions, and torture of millions more, is not "a crime against humanity", these words have no meaning. To justify murder and torture on an industrial scale, black people had to be declared inferior, or not human. As historian James Walvin noted, there was a "form of bondage which, from an early date, was highly racialised. By 1750, to be black in the Americas (and often in Europe) was to be enslaved." The 1774 History of Jamaica argued black slaves were a different species, able to work "in a very bungling and slovenly manner, perhaps not better than an orangutan".

Material being produced today to mark the anniversary of the abolition of the slave trade makes it appear that white people liberated black - the assumption being they could not do it themselves. In reality, slaves rose against the trade from its inception. This broke it.

The first recorded slave revolt was in 1570. There were at least 250 shipboard rebellions. Jamaican slave society faced a serious revolt every decade, in addition to prolonged guerrilla war. In 1760, 30,000 Jamaican slaves revolted. The culmination, recorded in CLR James's magisterial The Black Jacobins, was the 1791 slave revolt in St Domingue. After abolition of the trade, slavery in British possessions was abolished following revolts in Barbados in 1816, Demerara in 1823, and Jamaica in 1831, in which 60,000 slaves participated. For this reason Unesco officially marks August 23, the anniversary of the St Domingue rebellion's outbreak, as slavery's official remembrance day.

No one denigrates William Wilberforce, but it was black resistance and economic development that destroyed slavery, not white philanthropy.

Slavery's reality is increasingly acknowledged outside Britain. One of the few things on which I agree with George Bush is his description of transatlantic slavery as "one of the greatest crimes of history". The Virginia general assembly last month expressed "profound regret" for its role, stating slavery "ranks as the most horrendous of all depredations of human rights and violations of our founding ideals". The French national assembly declared slavery a "crime against humanity". In 1999, Liverpool became the first major British slaving city to formally apologise. The Church of England Synod followed suit.

The British government's refusal of such an apology is squalid. Until recently, almost unbelievably, it refused even to recognise the slave trade as a crime against humanity, on the grounds that it was legal at the time. It helped block an EU apology for slavery.

Two arguments are brought forward against official apology - not only by the government but by David Cameron. First, an apology is unnecessary because this happened a long time ago. This would only apply if there had been a previously apology - there hasn't been. Slavery was the mass murder of millions of people. Germany apologised for the Holocaust. We must for the slave trade.

Second, that apologising is "national self-hate". This is nonsense. Love of one's country and its achievements is based on reality, not denying it. A Britain that contributed Shakespeare, Newton and Darwin to human civilisation need fear comparison with no one. A British state that refuses to apologise for a crime on such a gigantic scale as the slave trade merely lowers our country in the opinion of the world.

It is for that reason that I invite all representatives of London society to join me in following the example of Virginia, France, Liverpool and the Church of England, by formally apologising for London's role in this monstrous crime.

Ken Livingstone is the mayor of London mayor@london.gov.uk

Tuesday, March 20, 2007

放送法改正案 介入強め独立性侵害も

放送法改正の政府案がほぼ固まった。捏造(ねつぞう)番組を放送した局に、再発防止計画の提出を総務相が要求できるなど規制強化を盛り込む一方、NHKの受信料支払い義務化は見送られた。防止計画の提出要求は、運用次第で番組内容にまで政府が介入する恐れもあり、放送の独立性を侵しかねない。

きっかけは「発掘!あるある大事典II」の番組データ捏造問題だ。菅義偉総務相は「放送は国民に非常に大きな影響を与える。再発防止策を検討し、法制化する義務がある」と強調。不祥事が続いたNHKについても、経営委員会による会長らへの監督を明記するなど、権限強化を打ち出した。

現行の放送法では「政治的な公平」「事実を曲げない」などの義務を定め、事実と違う報道などの違反には注意、厳重注意、警告などの行政指導がある。また、電波法では電波の停止、免許取り消しなど行政処分も規定している。

ただ、電波停止などの厳しい処分は、社会的な影響が大きいためこれまで発動した例はない。もっと局をけん制しやすい条項を新設するのが改正案の狙いだろう。

放送などのメディアは、権力の乱用をチェックし、政府に都合の悪い中身であっても、事実で裏付けながら報道する基本的な役割がある。だから独立性と表現の自由が保障されている。データ改ざんなどは視聴者の信頼を裏切る行為だ。放送業界でも自主的にチェックを強める動きが出始めている。

NHK、民放連は、第三者機関である「放送倫理・番組向上機構」の中に、有識者による新しい委員会を設置する案に合意した。問題のあった放送局や制作会社に事情を聴き、検証や審理に当たる。その結果は、見解や勧告として放送局に通知し、再発防止計画の提出を求めるという。だが、拘束力が明確に打ち出せず、実効性には疑問も残る。

きのうの自民党通信・放送産業高度化小委員会でも、再発防止策を改正案に記すことは認められたが、実施は当面凍結するよう求める意見もあった。放送局自身や業界のチェック機能に期待する声が、党内でもあるからだろう。

捏造の背景には、番組の多くを制作会社へ外注しながらチェック体制が不十分であるなど、放送業界の構造的な問題がある。徹底した調査をして、実効性のある対策を主体的に打ち出したい。本当に変わったという印象がなければ、視聴者の不信感はぬぐえまい。中国新聞20070321
放送法改正案 介入強め独立性侵害も
'07/3/21
 放送法改正の政府案がほぼ固まった。捏造(ねつぞう)番組を放送した局に、再発防止計画の提出を総務相が要求できるなど規制強化を盛り込む一方、NHKの受信料支払い義務化は見送られた。防止計画の提出要求は、運用次第で番組内容にまで政府が介入する恐れもあり、放送の独立性を侵しかねない。
 きっかけは「発掘!あるある大事典II」の番組データ捏造問題だ。菅義偉総務相は「放送は国民に非常に大きな影響を与える。再発防止策を検討し、法制化する義務がある」と強調。不祥事が続いたNHKについても、経営委員会による会長らへの監督を明記するなど、権限強化を打ち出した。
 現行の放送法では「政治的な公平」「事実を曲げない」などの義務を定め、事実と違う報道などの違反には注意、厳重注意、警告などの行政指導がある。また、電波法では電波の停止、免許取り消しなど行政処分も規定している。
 ただ、電波停止などの厳しい処分は、社会的な影響が大きいためこれまで発動した例はない。もっと局をけん制しやすい条項を新設するのが改正案の狙いだろう。
 放送などのメディアは、権力の乱用をチェックし、政府に都合の悪い中身であっても、事実で裏付けながら報道する基本的な役割がある。だから独立性と表現の自由が保障されている。データ改ざんなどは視聴者の信頼を裏切る行為だ。放送業界でも自主的にチェックを強める動きが出始めている。
 NHK、民放連は、第三者機関である「放送倫理・番組向上機構」の中に、有識者による新しい委員会を設置する案に合意した。問題のあった放送局や制作会社に事情を聴き、検証や審理に当たる。その結果は、見解や勧告として放送局に通知し、再発防止計画の提出を求めるという。だが、拘束力が明確に打ち出せず、実効性には疑問も残る。
 きのうの自民党通信・放送産業高度化小委員会でも、再発防止策を改正案に記すことは認められたが、実施は当面凍結するよう求める意見もあった。放送局自身や業界のチェック機能に期待する声が、党内でもあるからだろう。
 捏造の背景には、番組の多くを制作会社へ外注しながらチェック体制が不十分であるなど、放送業界の構造的な問題がある。徹底した調査をして、実効性のある対策を主体的に打ち出したい。本当に変わったという印象がなければ、視聴者の不信感はぬぐえまい。

受信料の値下げ問題, NHK粘り腰で“休戦”

NHKが、受信料値下げを求める政治の側からの圧力に徹底抗戦している。今国会に提出予定の放送法改正案をめぐって大詰めの議論が行われた二十日の自民党通信・放送産業高度化小委員会で、NHKの橋本元一会長は現時点で値下げに応じられないとの意向を重ねて表明し、一応の理解を得た。NHKは今秋、新たな料金体系を発表する方針。あくまで自主的に値下げを行う構えだが、その努力が不十分であれば、政治圧力が再び強まる可能性もある。(小田克也、安食美智子)

「(総務省が試算した)受信料の二割値下げは容易ではない。時間を頂きたい」。橋本会長は同委員会の席上、こう発言。議員側からの値下げ要求を突っぱねた。これに先立ち橋本会長は十三日、同委員会の委員長を務める片山虎之助参院幹事長と国会内で会談。その際も片山氏から、受信料の支払い義務化で徴収率がアップすれば、どれだけ値下げできるか具体的に示すよう求められたが、難色を示している。

NHKは九月に、値下げを念頭に新たな受信料体系を発表する方針。一連の不祥事の影響で激減した受信料収入は回復基調だが、不祥事以前の状況には戻っていない。このため値下げすることで契約者数を増やし、全体として増収につなげる戦略だ。ただ、そのための財政収支の試算は徹底して行わなければならず、「今の段階で値下げ幅など、具体的なことは言えない」(関係者)とする。NHK幹部は、「自民党としては、統一地方選や参院選で、値下げを実現したとアピールしたいから、橋本会長に値下げすると言わせたいのだろうが、その手には乗らない」と予防線を張る。

値下げをめぐってはNHKが、政治家の微妙な力関係に配慮している感がある。これまでに菅義偉総務相の値下げ要求を断った経緯があり、片山氏の求めに応じて値下げすれば、今度は総務相のメンツをつぶしかねない。そんな心配から、現時点では値下げ拒否の姿勢を貫いたとみられる。「NHKにとって、元総務相の片山氏は大切な人。しかし当選四回で総務相に抜てきされた菅氏の影響力も無視できない」(関係者)と、両氏の立場に気を使っている。

二十日の自民党通信・放送産業高度化小委員会では、NHKが値下げに応じなかったこともあり、同局の悲願である受信料の支払い義務化も放送法改正案に盛り込まれない方向となった。橋本会長は委員会後、記者団に「値下げが条件なら、義務化の断念は、やむを得ない」と語気を強めた。これで、受信料をめぐる政府・与党とNHKの綱引きは、一時“休戦”となったもよう。ただ、NHKが九月に示す予定の料金体系で、値下げ内容が不十分であれば、政治の側が大幅値下げを再び求めてくる可能性がある。片山委員長は同委員会の最後に、値下げ問題に触れて「これだけまとまらなければ、(今回の放送法改正)案から除き、九月にNHKから案が出たら議論したらどうか」と提案。再度、徹底的に話し合うことをにおわせている。

흔들리는 방송시장 ‘외우내환’ 속앓이

방송계에 외우내환이 적지않다. 미국은 FTA 협상을 통해 방송개방을 요구하고 있고, IPTV 등 방송통신 융합문제는 물론 12월 대선과 맞물려 일부에서 방송 공영성 문제를 제기하는 등 당면 과제들이 산적했다. 이같은 문제는 선후와 내·외부를 가릴 것 없이 난마와 같이 얽혀 있는 형국이다. 장밋빛 미래를 위한 산고가 아니라, 자칫 방송 자체의 경쟁력 상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거세지는 개방압력=지난 19일부터 시작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고위급 회담에서 방송 문제는 섬유·자동차 등에 밀려 중요 의제에 포함되지 못했다. 미국은 그간 협상을 통해 ▲CNN 등 외국 위성방송의 한국어 더빙 및 한국 광고 유치 허용 ▲지상파 국산 프로그램 편성 쿼터를 현행 80%에서 50%로 하향조정 ▲유선방송사업자(SO)와 방송채널사업자(PP) 외국인 소유지분을 49%에서 51%로 상향조정 ▲온라인 주문형비디오(VOD) 시장 전면 개방 등을 요구해왔다. 주무 기관인 방송위원회는 8차까지의 협상에서 ‘수용불가’ 입장을 고수해 나름대로 ‘선방’했다고 평가하면서 “이제는 우리 손을 떠났다”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방송에도 경쟁이 확산돼야 한다는 게 시대정신이며, 그를 통해 시청자들이 보다 질 좋은 프로그램을 볼 수 있도록 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면서 “경쟁원리를 어떻게 방송통신 분야에 확산시킬지가 공정위가 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미국 측의 주장이 경쟁논리로 고스란히 수용될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발언이다. 이 때문에 방송계에서는 정부가 온라인 VOD 시장 개방 등 일부만 제외하고 대부분 미국의 요구를 수용키로 입장을 정리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IPTV 논리싸움 여전=방송위원회는 ‘네트워크·플랫폼·콘텐츠’로 3분류를, 정보통신부는 ‘전송·정보’의 2분류를 주장하고 있다. 방송위는 2분류가 KT 등 네트워크 보유자에 의한 시장 봉쇄가 우려된다며 반대하고 있다. 또 방송위와 정통부는 IPTV 전국방송 허용에서도 이견을 보인다. 방송위는 케이블 사업자처럼 IPTV도 사업 권역을 지역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정통부는 인터넷망을 이용하는 IPTV의 특성상 전국 단일사업권역이 적절하다는 입장이다.이 같은 입장차는 양측의 관할 산업을 보호하려는 ‘밥그릇 싸움’이 본질이다. 국내의 케이블TV는 엄밀히 말해 지상파 난시청을 해소하기 위해 도입했다. 스포츠 등 일부 채널을 제외하면 지상파 재전송이 ‘주력 사업’이다. IPTV가 도입되면 케이블TV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SO가 지역에 기반해 지상파를 재전송한다면 IPTV는 전국적으로 재전송이 가능하다. 방송위로서는 자체 콘텐츠 생산능력이 부족한 SO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3분류 체계와 사업권역 제한이 필요하다는 말이다.IPTV의 서비스 성격, 적용 법률, 인·허가 방식, 기간통신사업자의 자회사 분리 여부 등에 대해서는 22일 열리는 방송통신융합추진위원회에서 윤곽이 드러날 예정이다.

◇다시 불붙은 공영성 논란=KBS는 최근 일제시대까지 포함해 ‘방송 80년’의 역사를 강조하면서 공영방송의 역할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것이 아전인수격 해석이라고 주장하며 KBS에 대한 공세를 펼치고 있다. 실제로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지난 13일 KBS 수신료 거부운동을 선언했다. 이러한 정치적 공정성 문제는 12월 대선을 앞두고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이와 함께 공영방송에서 인기를 구가한 아나운서들의 연예기획사행은, 돈에 휘둘리는 공영방송 종사자들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방송아나운서협회는 김성주·강수정 아나운서 등의 ‘프리 선언’을 놓고 공영방송의 신뢰로 쌓은 이미지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사규 제정을 촉구할 예정이다.방송 공영성 논란은 방송 개방, IPTV 등의 이슈와 맞물려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방송 개방으로 인한 문화 정체성을 비롯, IPTV의 무한경쟁 시대를 헤쳐가야 할 ‘방송의 힘’을 방송 스스로가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2007년>
〈김주현기자 amicus@kyunghyang.com〉

社説:放送法改正 行政の介入強化には反対だ

放送法改正案がまとまった。NHK受信料の支払い義務化は見送られることになった。ただし、ねつ造など事実と違う番組が放送された場合、放送局に対して再発防止計画の提出を求め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条項が新たに加わった。

不祥事をきっかけに、受信料の不払いが急増し、NHKの改革と受信料徴収の仕組みをどうするのかが、放送法改正をめぐって問われていた。菅義偉総務相は義務化と受信料の値下げをセットで提示した。しかし、菅総務相が示した2割値下げをNHKが拒否したことから、義務化は見送りとした。この問題については、NHKの改革の動きを見ながら再度、検討することになった。義務化だけが先行し、NHKの改革は進まないということもあり得る。焼け太りを許さないためにも、見送りは妥当だろう。

一方、再発防止計画の提出は問題だ。この条項は、フジテレビ系列の関西テレビ(大阪市)が制作した「あるある大事典2」での番組ねつ造をきっかけに浮上した。問題のある番組が放送された場合、これまでは総務省が行政指導で注意や警告を行ってきた。それ以上の措置は電波法による放送の停止・制限、免許の取り消しだが、この間を埋める措置として、再発防止計画の提出が出てきた。ねつ造ややらせは、問題外の行為だ。しかし、事実であるのかそうでないのかについては、立場や考え方によって見方や判断が違ってくる場合も多い。番組制作だけでなく取材過程まで明らかにしないと、真偽がわからない場合もあるだろう。

また、現状でも、法的な拘束力はないものの、放送局は行政指導に従ってきた。これは総務省も認めている。そうなら、再発防止計画の提出の明文化は不要だろう。もちろん、放送局側も反省が必要だ。納豆ダイエット以外でもねつ造があったが、関西テレビの対応はお粗末で、自浄能力のなさが批判を浴び、行政に介入の口実を与える結果となった。

さらに、「あるある大事典2」でのねつ造発覚後も、TBSやテレビ東京で、制作過程での不適切な行為が明らかになっている。
再発防止計画の提出は、問題のある番組が増えていることが背景となっている。ただ、遅まきながら放送業界も対策を出している。

第三者機関の放送倫理・番組向上機構(BPO)に識者などでつくる委員会を設け、ねつ造などが確認された場合、勧告や見解を出し、放送局に再発防止策の提出を要求できるようにする。報道や番組の内容のチェックにつながりかねない条項は、言論や表現の自由という、憲法が定めている国民の権利に触れかねないという問題もはらんでいる。ねつ造などの問題番組は、放送業界の自主的な取り組みで解決すべきだ。当面施行は凍結するというものの、行政の介入拡大につながる再発防止計画の提出は、法案から削除すべきだ。毎日新聞 2007年3月21日 0時04分

Friday, March 16, 2007

受信料値下げ要求は総務相の越権か,放送法改正案巡り自民党との調整続く

総務省が今国会に提出する予定の放送法改正案を巡って,総務省と自民党の間で落としどころの探り合いが続いている。焦点となっているのは,NHKへの受信料支払いを義務化するかどうかである。菅義偉総務相は受信料の支払いを義務化する代わりに,受信料の2割引き下げを約束するようにNHKに強く求めている。これに対してNHKは要求をのめないと繰り返すばかり。2割もの引き下げは地上波放送のデジタル化投資などに影響が出るとして,一歩も退かない構えである。そのNHKの立場に一定の理解を示すのが自民党という図式だ。

そもそも,受信料を引き下げさせる権限は総務相にはない。受信料をいくらにするのかは,NHKが毎年国会に提出する次年度の予算に載せている。受信料の金額を含む予算を承認するかどうかを判断するのは国会である。予算承認を担う国会が,受信料が高すぎないかどうかチェックする機能を果たしているわけである。自民党からすれば,受信料の引き下げをNHKに迫る菅総務相の言動は越権行為に映る。

総務省と自民党の調整はついておらず,受信料の支払いを義務化する項目が,総務省が国会に提出する放送法改正案に盛り込まれるかは依然として不透明である。
(吉野次郎=日経ニューメディア)2007/03/16

Tuesday, March 06, 2007

[慰安婦問題]「核心をそらして議論するな」

いわゆる従軍慰安婦問題の核心は、官憲による「強制連行」があったかどうかだ。

米下院外交委員会で慰安婦問題に関する対日決議案が審議されている。日本の軍隊が若い女性を「強制的に性的奴隷化した」歴史的な責任を明確に認め、日本の首相は謝罪すべきだ、という内容だ。

日本軍が組織的に「慰安婦狩り」をしたかのように決めつけている。だが、日本政府の調査でも、これを裏付ける文書はない。歴史家の間でもこうした事実はなかった、というのが「定説」だ。この決議案を提出した議員らは、これらを覆すだけの確かな資料があるのか。

安倍首相は国会で、決議案は「客観的事実に基づいていない」と語った。麻生外相も、同様の見解を示して「甚だ遺憾だ」と述べた。曲解に満ちた決議案である以上、政府は事実を正確に説明して、採択を阻止しなければならない。

首相は、慰安婦の募集について、「狭義の意味の強制性を裏付ける証言はない」と強調した。「官憲が家に押し入り、人さらいのごとく連れて行く、『慰安婦狩り』のような強制的なもの」、つまり、官憲による強制連行はなかったということを明確にした。
 その一方で首相は、民間業者による、本人の意に反した「広義の強制性」があったことを認めた。だが、こうしたケースと、軍による強制連行とは、まったく違うものだ。

「強制性」を拡大解釈し、核心をそらして非をならす一部のマスコミや国会議員らは、今後も内外に誤った認識を広げるだけだ。
それにしても、この問題は、なぜ、何度も蒸し返されるのか。その最大の理由は、1993年、当時の河野洋平官房長官が発表した談話にある。それには、慰安婦の募集に「官憲等が直接これに加担した」などと、日本軍が強制連行したかのような記述がある。だが、これが裏付けのないまま書かれたことは、元官房副長官らの証言ではっきりしている。

自民党の有志議員らは、談話のあいまいな表現が、誤解を生む原因になっているとして見直しを検討中だ。米下院の決議案は、「談話の内容を薄めたり、撤回したりする」ものとして、こうした動きをけん制している。しかし、不正確な談話を見直すのは当然のことだろう。

河野談話を発表した背景には、韓国側の圧力を前に「強制連行」さえ認めれば問題を決着できるとみた甘さがあった。政府は米下院決議をめぐり、再び、外交上の失策を繰り返してはならない。(2007年3月7日2時0分 読売新聞)

「強制なしに誰が慰安婦になるというのだ」━元皇軍兵士父の遺言 安倍発言を怒る

1993年夏。父逝去の3ヶ月前、日本の某大手メディア企業に心底愛想を尽かし、仕事のあてもなく衝動的に依願退職する1年前のことだった。死の床にある父を見舞った際、フィリピンに初めて訪問したことを伝えた。これを発端に、当時メディアを賑わしていた従軍慰安婦問題が話題となった。父曰く。「わしは満州で慰安婦の管理を担当したことがある。彼女らは日本軍の命令を受けた指名業者が強制連行してきた。業者も慰安婦も砲弾飛び交う戦地に強制なしにどうして自発的にやってくるのだ」。その言葉には怒りが込められていた。当時の日本のメディアが「民間業者が慰安婦を(商いとして)自発的に戦地に連れてきた」との政府の「公式見解」を垂れ流していたからだ。(花崎渉)   

故人は1914年生まれ。「青年期を戦争に身を“捧げた”」いわゆる大正っ子世代である。専門学校中退後、20歳で現役召集された。徴兵期間中、上官に勧められて、あの小野田寛郎さんと同じ陸軍予備士官学校で学んだ。修了後は砲兵となり、朝鮮半島、旧満州、上海、インドシナ半島、重慶などアジア各地の戦線を10年以上転々とした。真珠湾攻撃から1ヵ月後には上海からマニラに入り、数ヶ月滞在した。直接関与した満州だけでなく、フィリピンでも従軍慰安婦の「招集」に間接的に関わったと語った。フィリピンでは日本軍の担当将校が業者を指名するとともに、業者とともに慰安婦集めに兵士が関与したと断言したことは脳裏にはっきりと焼きついている。   

先日の日本の内閣総理大臣安倍晋三の「軍が直接強制したとの証拠はない」との発言報道に接して全身から怒りが湧き起こってきた。敗戦後10年以上も経って生まれた2世議員。日本が欧米列強にキャッチアップする手段として選択された近代天皇制が内包していたファシズムと侵略戦争の不可避性という歴史への省察はもとより、一度も世間を底辺からのぞいたことも、ましてや貧困がいかなるものであるかを体験したこともない「お坊ちゃま」世襲議員である。弱者の立場、心情を知らないが故に、観念だけで容易にナショナリスト、タカ派になれるのだ。世襲議員が「支配」する永田町が超保守化する所以であろう。   確かに、父の死後、当時の防衛庁資料がスクープされ「(業者を介して)軍が関与していた」ことが明るみに出る。したがって安倍発言は「業者が強制した」「軍が業者と関わった」ことまでは認めた。しかし、「憲兵などが直接強制して現地女性を慰安婦にした証拠は認められない」と詭弁を弄して「(事実上)強制はなかった」と強弁した。   

仮に百歩譲って「軍が慰安婦集めに直接手を下さなかった」としても、旧日本軍が強制して女性を連行したことに変わりはないでないか。安倍を典型とする戦後の豊かな世代に育ったニューナショナリストの精神構造はわれわれの理解をはるかに超えている。A級戦犯としての処刑を偶然に免れ、首相にまで上り詰めた妖怪の異名を持つ祖父岸信介らの影響だけでは説明がつかないものを感じる。   

亡き父ら慰安婦問題に直接関与した旧皇軍兵士らの大半が草葉の陰から安倍の詭弁に憤怒の声を上げていることだろう。死の床で父はこうも言った。「軍は戦地への慰安婦連行をいやがる業者を強制した。前線・戦地の外にいる軍が民間業者に無理やりに協力させて現地女性を戦地まで連行したのだ」と。安倍の「(軍直接関与の)証拠はない」との発言は何に依拠した断定なのか。管見する限り、これを追及した日本のメディアはない。相変わらず転向主義者特有の理念なき「客観」報道を続けている。   

父はビルマ(ミャンマー)で「ありとあらゆる種類のマラリア病原菌を患った」(主治医)。敗戦後は強烈な反戦主義者となった。幼少のころの夏休み。8月15日の「終戦記念日」が近づくと耳にたこができるほど10年を超える従軍生活での悲惨な体験を語り、「2度とあんな馬鹿な戦争はするものじゃない」が口癖だった。戦死した同僚だけでなく、父らの後方からの砲撃で内臓を体外にはみ出して悶絶している中国人兵に遭遇すると合掌しながら安楽死させたという。   

1950年代半ばになると父は断続的に原因不明の高熱に襲われ始め、「マラリア後遺症の疑いあり」と権威ある旧帝国大学医学部教授に診断された。やがて大学病院のモルモット患者になり、またまた数え切れないほどの抗生物質を実験投与され、体調はさらに悪化した。当時で年間10万円にも満たなかったはずの軍人恩給支給額では仕方のないことだった。歴史を詭弁でもって歪曲する安倍発言は父ら恵まれなかった「大正っ子」の生涯をも冒涜するものである。 

独立U局6局がネット設立 番組を共同制作へ

在京キー局に属さない独立U局のうち、テレビ神奈川など6局が「東名阪ネット6(シックス)」を設立し、共同制作する新番組を4月から毎週1回、同時ネットで放送すると、5日発表した。独立U局同士のネット組織は全国初という。

参加するのはテレビ埼玉、千葉テレビ、テレビ神奈川、三重テレビ、京都放送、サンテレビジョン(神戸市)。幹事社を務めるテレビ神奈川の牧内良平社長は「大都市圏の視聴者をターゲットに、制作費を出し合って質の高い番組をつくり、競争力を高めたい」と語った。

6局はこれまでもドラマの共同制作や映画への共同出資をしてきた。新番組のクイズバラエティー「カルチャーショック」は、月曜午後8時から55分間放送する。(朝日新聞2007年03月06日)

「慰安婦」発言 いらぬ誤解を招くまい

旧日本軍による慰安婦問題をめぐって、安倍首相の発言が内外に波紋を広げている。
首相は先週、記者団の質問に答えてこう述べた。「当初、定義されていた強制性を裏付ける証拠はなかった。定義が変わったことを前提に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

これが米国などで「安倍首相、戦時中の日本による性奴隷を否定」「安倍首相、性奴隷に証拠なし」などと報じられた。韓国の宋旻淳外交通商相が不快感を示したりもした。
だが、この解釈は行き過ぎていたようだ。きのうの参院予算委員会で民主党議員に真意をただされ、首相は何度も「政府の立場は河野談話に書いてある通りだ」と繰り返した。

この問題についての日本政府の公式見解は、93年に出された河野官房長官談話である。旧日本軍が慰安所の設置などに関与し、「総じて本人たちの意思に反して行われた」と認めた。慰安所での生活について「強制的な状況の下での痛ましいものであった」としている。

首相は就任直後に、この談話を受け継ぐと表明した。そのスタンスは何ら変わらない。誤解はやめてほしい。そう言いたいのだろう。首相には「強制性」について、こだわりがあるようだ。それが首相の発言をわかりにくくしている。女性を集めた業者らが事実上強制をするような「広義の強制性」はあったが、当局が人さらいのように連行するといった「狭義の強制性」はなかった。きのう、首相はそう説明した。

だが、いわゆる従軍慰安婦の募集や移送、管理などを通じて、全体として強制性を認めるべき実態があったことは明らかだろう。河野談話もそうした認識に立っている。細かな定義や区別にことさらこだわるのは、日本を代表する立場の首相として潔い態度とは言えない。

首相の一言が大きな波紋を呼んだのは、首相自身がかつて河野談話を批判する議員グループの先頭に立ってきた過去があるからだ。このグループは、いまも河野談話の修正を求めようと議論を進めている。米国の下院に、慰安婦の問題をめぐって首相の公式謝罪を要求する決議案が出されたことに反発しているようだ。

政府は河野談話に基づいてアジア女性基金を発足させ、元慰安婦への償いの事業に民間と協力して取り組んできた。自民党が連立する村山政権の時からだ。以後、橋本龍太郎氏から小泉純一郎氏まで4代の自民党首相が「おわびの手紙」に署名し、元慰安婦に送ってきた。戦争で蹂躙(じゅうりん)してしまったアジア諸国との和解のために、官民が連携して積み上げてきた努力なのだ。

首相は政権として方針を決めた以上、要らぬ誤解を招く発言は避けるべきだ。日本の信用にかかわりかねない。米議会に対しては、こうした首相の手紙などの取り組みを説明すればいいことだ。 (朝日新聞2007.3.6)

Friday, March 02, 2007

JSATとスカパー、スカパーJSATグループの「中期経営計画(2007~2011年度)」を策定

スカパーJSATグループ「中期経営計画(2007~2011年度)」について ジェイサット株式会社(本社:東京都千代田区、代表取締役社長:磯崎 澄、以下JSAT)及び株式会社スカイパーフェクト・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本社:東京都渋谷区、代表取締役社長:仁藤 雅夫、以下スカイパーフェクTV)は、2007年4月2日に両社の経営を統合し、共同株式移転を行う方法で両社の完全親会社 スカパーJSAT株式会社(本社:東京都千代田区、代表取締役社長(予定):仁藤 雅夫、以下スカパーJSAT)を設立することに伴い、この度、スカパーJSATグループの「中期経営計画(2007~2011年度)」を策定しました。 

これは、スカパーJSATグループとして、 1)日本の有料多チャンネル放送のリーディングカンパニーとして、市場の拡大を牽引し、多チャンネル放送を通じて利用者の豊かな生活に寄与する, 2)すべての人に、多様な映像コンテンツを楽しんでいただくことを目指し、パイオニア精神をもって新たな技術を取り入れ、利用しやすい環境と充実した放送・通信サービスを提供することを柱に据えています。 

JSATとスカイパーフェクTVは、1996年のパーフェクTV!の開局以来、通信衛星を利用したDTH(直接受信)を介し、約10年にわたって日本における有料多チャンネル放送業界を担う両輪として、市場の拡大に努め、これまで420万件(累計総登録件数)を超える加入件数を獲得してきました。現在、放送・通信業界においては、全国放送を開始した地上デジタル放送や2011年に迫った地上アナログ放送の停波、光ファイバの普及拡大に加えて、次世代通信網であるNGN(Next Generation Network)インフラや無線LANなどによるモバイル環境のブロードバンド化、更にはネットにおける映像コンテンツ流通の拡大やトリプルプレイ・クワトロプレイ・FMC(Fixed Mobile Convergence)を中心とした通信・放送の大きな事業グループ化の進展など、両社を取り巻くメディア環境はめまぐるしく変化しています。 

このようなメディア間の競争激化の中、JSATとスカイパーフェクTVは、有料多チャンネル放送市場の拡大やメディア横断的な水平展開の強化のため、持株会社体制のもと、両社の事業を統合することを決定し、スカパーJSATグループとしての中期経営計画を策定しました。スカパーJSATは、この中期経営計画に沿って、ご家庭における多様で快適かつ良質な映像コンテンツの提供と、個人がいつでもどこでも簡単に楽しむことが出来る多様なコンテンツの提供の実現を目指してまいります。 

中期経営計画におけるサービス別施策の概要は次の通りです。

(1)スカパー!
主力サービスである「スカパー!(124/128サービス)」については、2008年夏をめどにペイ・パー・ビュー(PPV)やプレミアムチャンネルを中心に、先ず10チャンネル程度のハイビジョン(HD)多チャンネル放送を開始し、2009年秋をめどに30チャンネル程度に拡充するとともに、HDパックも発売する予定です。また、次世代映像符号化方式「H.264」に対応し、ホームネットワークにも対応した地上デジタル放送チューナー内蔵の高機能受信機を導入するなど、高付加価値サービスも計画しており、2011年度末時点の加入を360万件(累計個人契約件数)に伸ばします。

(2)e2 by スカパー! 
110度CSデジタル放送「e2 by スカパー!」については、現在2チャンネル体制のHD放送を、2007年度中に5チャンネル程度、更に2009年度までに10チャンネル程度まで拡充する予定です。三波共用受信機内蔵のデジタルテレビで手軽に多チャンネルをお楽しみいただけるe2 by スカパー!は、デジタルテレビの更なる普及拡大や新しい販売戦略施策により、2011年度で180万件(累計個人契約件数)を目指します。

(3)スカパー!光 
有線系サービスの主力である「スカパー!光」については、戸建て展開の本格化に伴い、現在のRF(Radio Frequency)方式による多チャンネル放送サービスに加えて、2007年度中にIP利用のコンテンツ配信サービスとの連携を進めます。また、スカパー!で開始されるHDチャンネルもサービスに組み込み、地上デジタル放送やBSデジタル放送と合わせて、最強の放送ラインナップを提供します。スカパー!光は、東名阪を中心に対象エリアを1,000万世帯以上まで拡大し、2011年度で80万件(累計個人契約件数)を目指します。

(4)IP、モバイル等のサービス 
IP放送については、2007年度に参入し、コンテンツアグリゲーションや顧客管理を行う予定ですが、Bフレッツ上の統合的な放送体制や次世代ネットワークNGNへの対応を関係各方面と協力して進め、スカパー!光も含めて全国をカバーする光ファイバによるコンテンツ配信体制を構築する計画です。また、パーソナルユーザーの開拓に向けて、無線LAN等を利用して小型モニター(個室テレビ、モバイル端末、PC、ゲーム機器、PDA、カーナビゲーションなど)に対して多チャンネルコンテンツを配信するLightなスカパー!サービスの開発を行います。また、モバイルマルチメディア放送事業の可能性やセグメント化された多彩なコンテンツ開発と流通をIPで実現し、グリッドコンピューティングを活用した個人レベルの放送や通信サービスも検討します。このように、IP・モバイルについては、著作権処理の柔軟化や携帯端末の高機能化も見据え、2011年度で130万加入(累計加入件数)を目指します。

(5)お客様主義の徹底とコンテンツの更なる充実 サービス全体では、「お客様主義の徹底」を掲げ、複数台契約割引をはじめ、既加入のお客様を対象にした各種割引サービスの導入やお客様との対話の機会を増やす「フレンドリーコール」の拡充など、コールセンターの強化を行います。また、有料多チャンネル放送市場拡大のため、HD化の推進やJリーグJ1/J2全620試合生放送などコンテンツの充実を図るとともに、家電量販店を中心に様々な販売ルートでの訴求・獲得も目指し、お客様満足度の向上とARPUの向上、解約の防止、復活契約の推進に努めます。

(6)衛星通信事業 衛星通信事業では、衛星インフラの効率的な調達と安定的な運用を進め、また協業によるサービスのエリアの拡大を図ります。さらに放送、公共、グローバル、移動体を中心とした衛星の優位領域の追求を進め、インフラ事業者としての安定供給の使命と安定的な利益創出、キャッシュフローの創出を両立させます。 

こうした施策の結果、スカパーJSATグループの目標とする加入件数については、2011年度末時点サービス全体で800万件(累計総登録件数)を見込んでいます。また、2011年度におけるスカパーJSATの連結営業収益は2,400億円、経常利益は同380億円、EBIDTAは同500億円を見込んでいます。 スカパーJSATグループは、この中期経営計画を掲げ、多チャンネルコンテンツの集積・発信基地として、すべての人に個性的で豊かな映像ライフをお届けするメディアグループを目指してまいります。* 本資料に記載されている将来の業績に関する計画、見通しなどは、現在入手可能な情報から得られた当社グループの経営者の判断にもとづいております。従いまして、これら業績見通しのみに全面的に依拠して投資判断を下すことは控えられるようお願いいたします。実際の業績は、様々な重要な要素により、これら業績見通しとは大きく異なる結果となりうることをご承知おき下さい。

Thursday, March 01, 2007

NHK受信料支払い義務化、今国会へ提出断念

総務省は1日、NHK受信料の「支払い義務化」を今国会に提出する放送法改正案には盛り込まない方針を固めた。菅(すが)総務相は義務化の前提として「受信料の2割値下げ」を求めていたが、NHKの橋本元一会長は同日、早期の値下げ判断はできないと表明。義務化によってNHKの増収効果が期待されるのに、視聴者への還元策がはっきりしないままでは国民の理解が得られないと判断した。

橋本会長は1日の記者会見で、受信料の2割値下げについて「達成できるという根拠を、我々は持ち得ない」と述べ、総務省側の要求を事実上、拒んだ。菅総務相は「義務化と値下げはセット」だとNHK側に求めてきた経緯があり、義務化法案の提出を模索してきた総務省も「義務化見送り」の方針に転換した。

現行の放送法では、テレビを見ている人はNHKとの受信契約を結ぶ義務はあるが、受信料の支払い義務は明記されていない。支払い義務化で、NHKは未契約者への支払い督促がやりやすくなる。急増していた受信料不払いを減らすために、政府は支払い義務化の法案を今国会に提出する予定だった。

菅総務相は先月末、自民党でこの問題の責任者となっている片山虎之助参院幹事長と国会内で会談。法案を今国会に提出するかどうかについて、NHKの値下げ対応の様子をもう少し見定めることで一致した。ところが1日、橋本会長が早期値下げを拒んだことで見切りをつけた。

NHKの受信料の不払いが増えたのは、職員の不祥事が相次いだことが原因だった。竹中平蔵・前総務相時代にまとめられた昨年の政府・与党合意では、NHK改革が進むことを前提に受信料の支払い義務化と値下げを検討する、という内容が盛り込まれていた。 朝日新聞2007年03月02日06時04分

NHKの「受信料義務化」で本当は何も変わらない?

NHK受信料の支払い義務化を巡る議論が迷走している。NHKを監督する総務省は,受信料を義務化する法案を作ったが,今国会に提出するかどうか微妙になってきた。総務省は法案提出の条件として,NHKに受信料の引き下げを約束させたい。これに対して,NHKは受信料の値下げを前提とする義務化には後ろ向きだからだ。

受信料の義務化によって,現在3割にも上る受信料の未払い世帯が支払いに転じ,徴収率が本当に高まるのであれば,NHKにとり値下げもやぶさかではない。しかし義務化しても,それによって急に受信料の徴収率が改善することはないだろう,というのがNHKの判断である。義務化の効果が怪しいのに,値下げなど約束できないというわけだ。
 この義務化を巡って識者や視聴者などの間で,賛成や反対の議論が活発に繰り広げられている。が,そもそも義務化といっても,視聴者にとって今と何かが劇的に変わるのかと問われれば,答は「ノー」だ。

言葉が独り歩きする

説明しよう。現在の「放送法」には,「テレビを設置した人はNHKと受信契約を交わ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受信契約の義務」の規定がある。この放送法の規定を見直して,「テレビを設置した人は,NHKに受信料を支払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ように「支払いの義務」に変更しようというのが,今回の法案の主な改正点である。またテレビを設置した人が,NHKにそのことを通知しなければならない「通告の義務」という規定も加わる。さらに,不正に支払いを免れたり,支払いが遅れた人に対する「割増金制度」や「延滞金制度」が放送法に盛り込まれることになっている。

ただ,実はこれらの規定はすでに存在する。テレビを持つ人が放送法で義務付けられているNHKとの契約に,すでに含まれているのだ。NHKと視聴者の契約関係を記した「放送受信規約」を見ると,「支払いの義務」「通告の義務」「割増金制度」「延滞金制度」が全部書いてある。「受信料の義務化」といっても,この規定が放送受信規約から放送法に移るだけなのである。

では受信料の支払いを義務化する法案が成立して何が変わるのかというと,二点しかない。一つは,放送法と放送受信規約の二段構えの仕組みが放送法に一本化されて視聴者に分かりやすくなるということ。もう一つは,すでに実施している不払い者に対する受信料の支払い督促などの法的手続が,簡略化されるということだ。

法改正によって,受信料を払っていないと罰則が科せられるようになったり,誰かが家に上がり込んでテレビを隠し持っていないか確認したりする,といった受信料徴収の強制力が著しく高まるということは決してないのである。「受信料の義務化」という言葉から,何かNHKが今より強い権限を使って受信料を徴収するようになるという印象を抱くのであれば,それは間違いである。NHK自身も,「受信料を義務化しても,徴収率が急に高まるわけはない」と冷静に見ているくらいだ。

NHKのネット進出の衝撃

むしろ視聴者にとって,もっとインパクトのある法律の見直しが,今国会で予定されている。それはNHKによる本格的なインターネット進出を認めるための法改正である。

現在,NHKが法的に認められている業務は,基本的に公共放送だけである。総務省は,これでは通信と放送の融合時代にマッチしないということで,NHKの業務に関する規定を見直そうとしている。NHKが,インターネットを通じて番組を配信して収入を得られるようにする,というのだ。法律が見直されれば,NHKは1本いくらといった形で,番組をインターネットで売ることができる。今国会での法案成立を経て,NHKは2008年に本格的にインターネット進出を果たすことになる。

2008年からの本格的なインターネット進出を控え,NHKは放送済みの番組の出演者などと交渉して,インターネットで流すための許可を得る方針である。さらに,NHKの制作部門は,これから新しく作る番組について,事前にインターネット配信の許可を出演者などから得て番組作りに取りかかることにしている。2008年以降,インターネットで見られるNHKの番組が増えていきそうだ。

NHKの取り組みにより,テレビ番組をインターネットで見るという視聴スタイルが定着すれば,「テレビのネット化」の動きが民放にも波及するかもしれない。民法は人気番組をなかなかインターネットで公開しようとしないのだが,テレビ番組の見方が変われば,より積極的に取り組まざるを得なくなるはず。“何も変わらない”受信料の義務化に比べたら,NHKによるインターネット進出のインパクトは決して小さくない。 (吉野 次郎=日経ニューメディア)  [2007/03/02]

일본취재도 내재적 접근

외국 생활이 다 그렇듯 새로운 경험과 발견의 연속이다. 지난 1월5일 도쿄 현지에 부임해 열흘 남짓 준비 기간을 거쳐 정식으로 특파원 일을 시작한 지 두 달이 채 못 되는 기간이지만, 일본이라는 사회를 새삼 곰곰이 생각해 볼 작은 만남들이 이어졌다.
그것을 한 가지 모습으로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얼버무리자면 포착하기 어려운 일본의 다양한 얼굴을 대면했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다.
우선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본부터 얘기하자면 이런 것이다. 도쿄 지국사무실에 깔린 인터넷선을 속도가 느린 에이디에스엘(ADSL)에서 광통신으로 바뀌고 싶어 엔티티(NTT)에 문의했다가 절차가 너무 까다롭고 시간이 많이 걸려 포기하고 말았다. 건물주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공사하는 데 한 달 정도 걸린다고 한다. 건물주의 허락을 받을 이유가 뭐냐고 물어봤으나 절차가 그렇다며 뾰족한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엔티티와 관련된 것이다. 전임 특파원 이름으로 된 여러 대의 전화회선을 본인 이름으로 넘겨받으려고 절차를 물어보니 5천엔 넘는 수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역시 뚜렷한 이유를 듣지 못하고 ‘거액’의 수수료를 낼 수밖에 없었다. 한 은행으로부터는 신용카드 발급이 거부됐다는 통보를 받고 곧바로 이유를 물어보니 그것은 이야기 해주지 않는 것으로 돼 있다는 답만 전화상으로 흘러나왔다. 또다른 은행에서는 발급된 내 신용카드가 다른 은행에선 거부된 이유가 아직도 궁금하다. 커피전문점에서도 일본의 후진성은 발견된다. 커피 맛은 가격에 견줘 훌륭하지만 실내 공기는 한국보다 훨씬 나쁘다. 대개 흡연석이 설치돼 있지만 구분이 모호해 공기가 탁하다. 그러고 보면 일본은 아직도 흡연자 천국이다.
그러나 작은 감동과 새로운 발견도 많이 접했다. 부임 초기 혼자 생활 때 일본식 냄비요리 전문집에 들어가 오랜만에 맛있는 저녁을 먹고 나오는데 점장이 문밖까지 나와 배웅을 한다. 그리고 작은 비닐 우산 하나를 건넨다. 밖을 보니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얼마 전 이부키 분메이 문부과학상은 한 공개강연에서 “유구한 역사의 가운데서 일본은 줄곧 일본인이 다스려 왔다. 극히 동질적인 나라다”라고 말했다. 눈에 띄는 일본인들의 남다른 동질 지향성을 생각한다면 이부키의 발언은 크게 그르지 않다. 하나같이 허벅지 위로 올라오는 짧은 치마 교복을 입어,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도쿄 여고생들의 옷차림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다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부키의 발언은 얼마나 단순화한 것인가. 짧은 취재과정이지만 배타적인 동질성보다는 일본사회의 다양한 사고와 유연성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다. 저축은 엄두도 못 내는 팍팍한 삶이지만 “남들도 잘사는 사회를 꿈꾸며” 사회운동에도 열심히 참가하다는 30대의 프리터(아르바이트나 파트타임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일본의 젊은 사람) 미즈스나 준이나, 납치문제와 북핵문제 분리를 주장하고 일본 안의 과도한 내셔널리즘을 우려하는 가토 고이치 전 자민당 간사장 같은 이들을 만난 것은 즐거움이었다.
사실 ‘섬세하고 까다로운 이웃’ 일본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우리의 프리즘만을 고집하다간 우리의 초점은 엉뚱한 곳으로 향하기 쉽다.
몇겹씩 덫칠해진 화장발이 아닌 맨얼굴의 일본을 만나고 보여주는 일을 무엇보다 염두에 두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러자면 그들 안으로 성큼 들어가는 내재적 접근법도 필요할 것 같다. 북한 사회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 그것이 유용했다면 일본을 아는 데도 쓸모가 있지 않을까?
김도형/도쿄 특파원aip20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