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08, 2007

大リーグ放映権

第1回 ヤンキース入りした松井秀が、「ボクがメジャーに行ったら、イチローさんみたいに試合を中継してくれますか?」
(05/08/01)抜粋:日刊ゲンダイ連載【立花孝志 大リーグ中継の内幕】

3年前のオフ、松井秀喜がヤンキースへの移籍が決まったあと、NHKの関係者にこう言ってきたそうだ。NHKは現在、年間約300試合の大リーグを中継している。大リーグの試合はNHK、フジテレビ、TBS、BSi、BSフジ、スカパーが放送権を持つ。 BSに関してはNHKが30球団のうち14球団のホームゲームの放送権を優先的に取れる。

地上波の放送権は30球団の主催試合をNHKと民放2社できっちり3等分しているが、NHKが選んだ10週間分のゲームを優先的に中継できることになっている。 NHKはア・リーグ、ナ・リーグ30球団の中からイチローや松井秀など日本人選手がいるチームをピックアップする。それから日本でもなじみのある球団を取る。イチロー(マリナーズ)、松井秀(ヤンキース)、野茂(現ヤンキース3A)などがア・リーグ球団に属しているため、どうしても同リーグの試合が多くなる。

さらに放送権を持っていない残り16球団のホームゲームの中から、20試合を中継できる。これをワイルドカードと呼んでいる。 残り16球団のホームゲームはBSではBSiとBSフジが放送権を保有している。ヤンキースやマリナーズがビジターに出た試合をNHKではなく、民放の地上波あるいはBSが放送するのはそのためである。 

大リーグは1球団年間162試合を戦う。主催試合は81。ワイルドカードを除く、14球団のホームゲームだけでも1134試合の放送権をNHKは持つ。 松井秀喜がヤンキース入りした2003年には年間334試合を中継した。松井秀喜の心配は杞憂だったのである。それでも800試合以上は中継せずに“捨てて”いる。もったいないので、フジやTBSにまた売りをしたらどうかと提案したこともあったが、受け入れられなかった。ちなみにその年の日本のプロ野球の中継試合は149。 NHKがこれだけ大リーグ中継に力を入れるのは野茂の1年目の活躍で衛星放送の受信契約数が飛躍的に伸びたからだ。その後、マグワイアとソーサの本塁打記録争い、イチローや松井秀喜の活躍が追い風になり、受信契約を伸ばした。 それではNHKは放送権料として一体、いくら払っているのか。

第2回 海老沢会長が激怒して放送権料が年間36億円が25億に
(05/08/02)抜粋:日刊ゲンダイ連載【立花孝志 大リーグ中継の内幕】

年間約25億円。これがNHKが払う大リーグの放送権料である。5年契約が切れたため、2004年に契約を更新。それまでの約2倍で5年契約を結んだ。 それでも当初の契約交渉の段階では金額は約36億円だった。もともと大リーグ中継の放送権は電通がMLB(大リーグ機構)から購入。それをNHK、TBS、フジ、BSi、BSフジ、スカパーの6社に販売する。03年限りで契約が切れるため、電通は年間約36億円の5年契約で放送権を買った。前回の3倍である。

それをNHKに売り込んだのだが、当時のNHKの海老沢会長の逆鱗に触れたと聞いた。というのもBS放送が開始した直後、NHKの関連会社であるMICOがMLBとPGA(米プロゴルフツアー)の両者と直接交渉を行おうとしたからだ。代理店を介在させなければ、より安く放送権を購入できると考えたからだ。ところがそれまで両者の放送権を持っていた電通が「MLBだけはウチに放送権を残してほしい」とNHKに泣きを入れたという。そして電通に放送権を譲った経緯がある。それが突然、3倍のカネでの契約延長の話。昔の恩義を忘れたのか、と激怒した海老沢会長(当時)は「メジャーリーグの中継なんかしなくてもいい!」とまで言ったと聞くが、結局、電通の関係者が海老沢会長の自宅前で土下座して陳謝。 

海老沢会長は「2倍以上は出せない」と値下げを要求。電通側が受け入れ、前回の約倍の年間約25億円で妥結したのである。民放の放送権料はNHKの10分の1くらいだと聞く。だからこそ前回書いたように、NHKが優先的に中継できる球団、試合を指定できるのである。さて電通は36億円で売るはずのメジャーの放送権が25億円でしか売れなかった。NHKは大助かりだが、電通にとっては大きな損失だ。ところが電通はそれを逆手にとって新たな商売、収益源を生み出した。それがNHKの大リーグ中継にも波紋を招くことになる。それは一体なにか。


第3回 NHK中継に民間企業CMが映るカラクリ
(05/08/03)抜粋:日刊ゲンダイ連載【立花孝志 大リーグ中継の内幕】

テレビ視聴者にしか見えないバーチャル広告なのだが前回、NHKの大リーグの放送権料が当初の年間約36億円から、約25億円にダウンして契約した話をした。MLB(大リーグ機構)から放送権を購入した電通としては、単純に計算しても約11億円の差損が出る計算だ。ところで大リーグの中継ではバックネットの下のフェンスに、日本の民間企業の広告が映ることがある。実際のメジャーの球場にはない看板広告だ。テレビの試合中継にかぶせて映っているだけで、テレビ視聴者にしか見えないものである。

いわゆるバーチャル広告だ。実はあれが約11億円の差損と関係がある。約11億円の差損が生じることになった電通はその代わりに、NHKが放送する試合の事前通告とバーチャル広告の了解を取り付けた。すなわち、NHKが中継する試合を事前(1カ月前)に連絡してもらい、それに合わせて企業からバックネット下の広告を取るのである。

その際、米国のテレビ局が中継する試合をそのまま流すのでは広告は入らない。大リーグの試合を中継する米国のテレビ局は、MLBI(大リーグ機構インターナショナル)にも映像を流す義務がある。その映像をMLBIは世界各国、各地域に流すのだが、その段階で電通は募集した企業の広告をゲームの画面にかぶせる。もちろん、MLBIの許可を取ったうえでのことである。中継の最中にNHKのアナウンサーが、「これは大リーグのアジア向けの放送をそのまま流しているため、広告が映っております」と言っているのはそのためだ。 NHKで全国放送される影響は大きなものがあるのだろう、電通はそのバーチャル広告で差損を上回る収入をあげているとも聞いている。

NHKには一銭も入らないのだが、バーチャル広告が入ったから放送権料も安くなったという考え方もできる。 大リーグ中継に限らず、スポーツと企業スポンサーは今では切っても切れない関係にある。その両社の関係を考えさせられる出来事でもあった。

第4回 大リーグの年間放送権料は高いのか?
(05/08/05)抜粋:日刊ゲンダイ連載【立花孝志 大リーグ中継の内幕】

大相撲・Jリーグ・プロ野球に比べて、NHKの大リーグの年間の放送権料が約25億円であることは以前書いた。他の競技と比較するとどうなのか。例えば大相撲は年間30億円、Jリーグは19億円、ウィンブルドン・テニスは約8億円、米プロゴルフツアーは約15億円、プロ野球は巨人戦の1試合1億7000万円を含め、約35億円である。メジャーの放送権料が高いか安いかは、関心を持つ度合いにもよろうが、製作単価だけをみると実は安上がりなのである。昨年NHKは大リーグの試合を311試合、中継した。1本当たりの製作単価は1時間で473万円。大リーグはアメリカから映像が送られてくるからだ。

日本のプロ野球やJリーグなどの試合を放送するには、現場に中継車を出し、アナウンサーや技術部員などスタッフを派遣。独自の映像を作らなければならない。メジャーリーグ中継では、送られてくる映像にかぶせて実況や解説は必要だが、現場にスタッフや機材を出すことはまずない。同じ野球でもプロ野球では製作単価は1時間当たり1096万円と倍以上かかるし、国内プロゴルフはさらに高く2301万円になっている。これはゴルフが野球やサッカーなどより、カバーする場所が広いからだ。ちなみに米ゴルフツアーは976万円と国内ゴルフの半分以下だ。逆に土俵を中心に映している大相撲のそれは838万円とプロ野球より低くなっている。 しかも大リーグ中継はサッカーなどに比べ、1本当たりの放送時間が平均3時間と長い。さらに地上波、BS、ハイビジョンの一体化放送をしていることもメリットになっている。

私が入局した20年前に比べ、NHKの収入は約倍の約6800億円にアップしている。それには大リーグ中継が寄与しているのは間違いない。 ちなみに今週末から始まる高校野球甲子園大会は夏、春とも放送権料はゼロである。 大リーグ中継の話はこれでひとまず終わりとさせていただきます。ご愛読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Thursday, April 05, 2007

「公共放送の在り方問う」 受信料不払い訴訟で弁護団

NHK受信料不払い問題で東京の弁護士10人が4日、支払い督促に異議を申し立て、東京地裁、簡裁で裁判が続いている3人の依頼を受け弁護団を結成した。都内で開いた記者会見で「不祥事や政治家との関係で国民の信頼を裏切り、契約に違反した」と述べ、公共放送の在り方をめぐってNHKと全面的に争う姿勢を示した。

弁護団の沢藤統一郎弁護士は「NHKは信頼に応える放送、報道をするのに対して、視聴者が受信料を支払うという関係が放送法の趣旨だ」と指摘。その上で「信頼を損なっても解約できない契約は無効とも言える。公共放送が何によって成り立つかを正面から問う重大な裁判だ」と訴えた。

依頼した3人はいずれも都内の30代の男性。カラーテレビ受信契約を結んだが、約4万1000円-5万3000円の支払いが滞っているとして督促を受けた。相次ぐ不正経理などの不祥事や番組内容への不満などを理由に異議を申し立てているという。(2007年4月4日 18時55分,共同)

Wednesday, April 04, 2007

동북아시아의 시민공론장과 저널리즘

강상중 교수(도쿄대학)

오늘 강연의 세 가지 키워드는 동북아, 공론장(public sphere), 저널리즘이다.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등 일본의 일반적인 전국 신문들은 동북아시아라는 말 대신 북동아시아라는 말을 사용한다. 한국이나 북한, 중국에서 동북아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다. 왜 그러는가? 북동아라는 말은 동북아에 대한 영어표현인 'Northeast Asia'를 직역한 것인데, 영어표현 'Southeast Asia'를 남동아라고 하지 않고 동남아라고 부르는 것과 비교된다. 이것은 일본의 저널리즘이나 학계가 동북아 지역을 태평양 건너편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의 시각을 통해 이 지역을 바라본 것이다. 오늘은 미국 문제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미국의 그늘이란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적개심, 불안, 적의에 의해 형성되는 '공적인 문제'

일본의 저널리스트와 연구자들은 일본 언론의 북한 보도 행태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일본의 미디어 현상을 얘기할 수 없다. 과거 북한에 대한 보도는 엄청난 것이었고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으로 지금도 막대한 문제가 있다.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가장 큰 문제는 '공적인 것'이 위축되거나 혹은 변질된다는 것이다. 세계화는 단순히 경제, 금융,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공적인 것으로서의 정치가 없어지고, 위축되고, 축소되고, 변질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1998년 바우만(Z. Bauman)이란 학자는 <정치의 발견(In search of politics)>이란 책에서 흥미로운 사례를 소개했다. 형기를 마친 아동 성범죄자가 어떤 지역에 들어왔다. 그 지역은 혼란에 빠졌고, 지금까지 공적인 발언을 한 적도 없고 관심도 없었던 한 주부가 그 지역의 평화를 위해 전투적으로 활동했다는 얘기다. 그 주부의 활동은 불안, 증오심, 가족애 등에 따른 것이었고 그것이 정치적인 정체성을 형성했다. 공적인 문제를 긍정적, 적극적인 요인이 아니라 적개심, 불안 등 부정적인 요인을 통해 확립해 간다는 것이다. 바우만은 거기에 언론이 개입되면 자유로운 언론 공간이 없어진다고 주장했다.

일본에서의 북한 보도도 마찬가지다. 일상적인 가족 사랑과 국가적인 공동체가 연결이 돼서 폐쇄적인 보도가 확립된 게 아닐까 한다. 즉 내적인 불안을 부추기는 결항성과, 적국을 만들어내는 집단국가가 생겼을 때 자유로운 언론 공간은 너무 쉽게 소멸되는 하나의 사례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반일적인 보도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불안, 증오, 적의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지렛대로 해서 공적인 것이 확립되어 갔을 때 아주 강한 압력과 대립이 성형성된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생활을 통해 알 수 있다.

냉전의 불완전한 붕괴

교토(京都)대학의 야마구라 시이치라는 동아시아 전문가의 말을 빌린다면 동북아 지역은 세 가지 단층으로 나눌 수 있다. '관계(nexus)로서의 동아시아', '역사로서의 동아시아', '미래를 향한 프로젝트로서의 동아시아'가 그것이다. 관계로서의 동아시아는 분명 현재의 동북아와 관련된 것이다. 그렇다면 동북아는 어디인가? 여러 이론이 있지만 경제적으로만 보자면 일본, 한국, 중국대륙, 경우에 따라 대만과 몽골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그러나 나는 6자회담으로 대표되는 6개국을 동북아 지역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본다. 즉 남북한과,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협의의 동북아는 역시 한중일 3국을 지칭한다. 3개국은 세계 경제 안에서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다. 동남아를 포함해 동아시아에서의 무역은 유럽연합(EU)에 비견될 정도로 커졌다. 외화의 이동, 인적·물적 이동, 학술의 이동, 문화의 이동 등은 실체적으로 EU 통합에 필적할 만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지역에는 여전히 국가의 로컬리티가 남아 있고 국가간 대립은 경제·기술·문화의 교류와 비대칭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대중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한류(韓流), 일류(日流), 화류(華流)가 있지만 한편에서는 혐한(嫌韓), 혐중(嫌中), 반일(反日)이 있다. 이렇게 보더라도 다양한 관계, 넥서스가 있는 한편으로 그에 대한 일종의 안티테제가 있다. 이런 가운데 이 지역에 제대로 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나. 어떤 아이덴티티를 형성할 것인가.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그것은 냉전의 붕괴라는 것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국가와 민족으로 분열·대립되고 내전의 상처가 있는 이 지역에서 하나의 틀이 붕괴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완전히 붕괴된 게 아니라 형태를 바꿔 가치와 행동과 문화의 패턴을 형성하고 있는 요인이 여전히 남아 있다.

기억의 인터페이스를 구축하자

둘째, 역사로서의 동아시아는 이 지역이 EU 및 서유럽과 다른 것은 역사의 무게가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전을 했던 분단국가가 현존하고 있다. 역사를 둘러싼 반목도 있다. 1995년 <타임>지가 '역사의 전쟁은 끝났나'라는 특집에서도 일본이 어떻게 역사와 싸우고 있는지에 대한 기사를 썼다.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종군위안부, 오키나와, 남경대학살 등을 둘러싼 역사 문제가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의 역사 문제, 한국에서의 베트남전 문제 등과도 관련이 있다. 한·중·일이라는 국가의 단위로 봤을 때 역사라는 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역사가 어떻게 기록되고 있고, 어떤 식으로 국가적 정체성과 역사가 형성됐는가, 역사의 기억에 대한 공유가 가능한가 등을 한국의 대학과 시민사회, 저널리스트들과의 관계를 통해 심화하고 기억의 인터페이스를 구체적으로 공유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의 전쟁에 대한 기억, 그 가운데서 오키나와 전쟁에서 싸우던 이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상처입은 사람들, 중국에서 상처입은 사람, 동아시아에서 죽은 사람들은 입장이 매우 다르다. 과거 식민지 지배와 전쟁의 기억이 한국과 북한에 있어 어떻게 형성되고 변질되고 창조됐는가를 우리는 무릎을 맞대고 여러 형태로 논의할 수 있다. 그러면서 상호간 기억의 인터페이스를 확대하는 대학과 저널리스트와 시민사회의 연대가 가능하다고 본다. 이런 움직임이 작게나마 여러 사회단체에서 시도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6자회담의 새로운 의미

세번째는 동북아를 하나의 프로젝트로 생각하는 것이다. 프로젝트로서의 동북아를 생각했을 때 동북아는 로컬한(지방적인) 것과, 내셔널한(국가적인) 것과, 리저널한(동북아 지역적인) 것이 중층적으로 연계돼있다. 나는 규슈 구마모토에서 태어났다. 규슈는 한국과 중국의 관광객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상호 의존이 심화된 상태다. 규슈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면 부산, 서울, 상하이가 도쿄보다 가깝다. 그렇게 보면 로컬한 것이 인터로컬(지방간)하게 혹은 리저널하게 결부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인터로컬'로서의 동북아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내셔널로서의 동북아 즉 국가간, 국민간 관계로 나아가는 동북아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6자회담이다. 안보문제는 로컬한, 내셔널한, 리저널한 관점 모두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그것을 가장 첨예하고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6자회담이다. 우리는 국가간 관계없이 미래 논할 수 없다. 그러나 국가간의 관계에서만 미래를 논하는 것은 과거의 경험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국가는 만능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6자회담을 다자간 안보틀로 삼아야 하고, 그를 통한 상설기구가 만들어져 군비, 군축, 대량살상무기 상호관리, 신뢰조성 메커니즘을 위한 틀을 만들어야 한다. 최근 6자회담에서 나온 합의에는 5개의 실무회의 중에서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의 메커니즘을 논하는 실무회의가 있다. 나는 그런 프로젝트를 통해 현실이 그걸 따라가고 있는 걸 보면서 일종의 확신을 갖는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베트남전과 한국전쟁이라는 최대 규모의 준국제전쟁이 냉전 시기에 일어났다. 두 전쟁의 사망자만 해도 600~700만 명이고 미군도 1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한국전쟁에서는 정전협정이나 평화협정 없이 60년이 흘렀다. 독일, 서유럽과는 달리 이 지역에는 또다시 전쟁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 6자회담은 바로 이런 상태에 종지부를 찍고 다자간 안보틀을 형성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일본의 현실을 생각하면 국가의 행위와 여론에는 괴리가 있다고 본다. 국가의 현실주의와 여론의 비현실주의가 괴리를 나타내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굉장히 어려운 문제지만 6자회담의 귀추가 이 지역이 진정으로 동북아로서의 지역성을 발휘할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다.

둘째, 프로젝트로서의 동북아를 생각할 때 각국의 국민공동체가 분열하고 대립하는 게 아니라 동북아라는 지역 네트워크가 중층적이고 다원적으로 확산되는 프로젝트로 생각하고 싶다. 그같은 지역 네트워크가 보다 강화되고 동북아를 우리의 생활 현장으로 실감하게 되는 시대를 앞당길 수 있다면 동북아를 덮어온 내셔널리즘이라는 괴물은 더 이상 날뛰지 않고 새로운 지역통합의 시대로 나아갈 것이라고 기대해왔다. 그런 점에서 저널리즘의 의의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연대의 복원

저널리즘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매개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언론 공간에서 그 사회가 공유해야 할 과제를 발견하고 분석해 제시하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 발신할 것인가, 무엇을 발신할 것인가가 언론의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언론인들은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기사를 썼고, 무엇을 보도했고, 무엇을 조사했고, 언론인의 원칙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중국에서 '반일폭동'이 일어났을 때, 혹은 북한 보도에 대해 지방지나 통신사는 어떻게 보도했는가, 한국과 중국에서 보는 관점은 무엇인가 등 각각의 시각의 호환성과 원근법을 얘기함으로써 자신의 기준을 다시 행각하고 재편하는 것이 한중일 저널리스트들에게 필요하고, 가능하다고 본다.

결론은 진부하다. 프랑스 혁명에서 말하는 자유, 평등, 연대(박애)라는 게 있는데, 나는 연대가 가장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재작년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폭동을 알아보기 위해 2주간 프랑스에 간 적이 있었다. 이민자들이 차를 불태우는 폭동이 있었지만 그걸 보면서 느낀 것은 프랑스의 공화성을 지탱하고 있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것 중에서 연대가 결여됐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연대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일을 통해 달성할 것인가는 동북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대학과 저널리즘, 시민사회의 삼위일체를 통해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프레시안에서 옮김)

Monday, April 02, 2007

In Japan, a Historian Stands by Proof of Wartime Sex Slavery

By NORIMITSU ONISHI The New York Times, Published: March 31, 2007

TOKYO

IT was about 15 years ago, recalled Yoshiaki Yoshimi, a mild-mannered historian, when he grew fed up with the Japanese government’s denials that the military had set up and run brothels throughout Asia during World War II.

Instead of firing off a letter to a newspaper, though, Mr. Yoshimi went to the Defense Agency’s library and combed through official documents from the 1930s. In just two days, he found a rare trove that uncovered the military’s direct role in managing the brothels, including documents that carried the personal seals of high-ranking Imperial Army officers.

Faced with this smoking gun, a red-faced Japanese government immediately dropped its long-standing claim that only private businessmen had operated the brothels. A year later, in 1993, it acknowledged in a statement that the Japanese state itself had been responsible. In time, all government-approved junior high school textbooks carried passages on the history of Japan’s military sex slaves, known euphemistically as comfort women.

“Back then, I was optimistic that this would effectively settle the issue,” Mr. Yoshimi said. “But there was a fierce backlash.”

The backlash came from young nationalist politicians led by Shinzo Abe, an obscure lawmaker at the time in the long-ruling Liberal Democratic Party, who lobbied to rescind the 1993 admission of state responsibility. Their goal finally seemed close at hand after Mr. Abe became prime minister last September.

Mr. Abe said he would adhere to the 1993 statement, but he also undercut it by asserting that there was no evidence showing the military’s role in forcing women into sexual slavery. His comments incited outrage in Asia and the United States, where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is considering a nonbinding resolution that would call on Japan to admit unequivocally its history of sexual slavery and to apologize for it.

To Mr. Yoshimi, Mr. Abe’s denial sounded familiar. Until Mr. Yoshimi came along 15 years ago, the government had always maintained that there were no official documents to prove the military’s role in establishing the brothels. Mr. Abe was now saying there were no official documents to prove that the military forcibly procured the women — thereby discounting other evidence, including the testimony of former sex slaves.

“The fact is, if you can’t use anything except official documents, history itself is impossible to elucidate,” said Mr. Yoshimi, a history professor at Chuo University here.

The emphasis on official documents, according to Mr. Yoshimi and other historians, has long been part of the government’s strategy to control wartime history. In the two weeks between Japan’s surrender on Aug. 15, 1945, and the arrival of American occupation forces, wartime leaders fearing postwar trials incinerated so many potentially incriminating documents that the Tokyo sky was said to be black with smoke. Even today, Japan refuses to release documents that historians believe have survived and would shed light on Japan’s wartime history.

Although Mr. Yoshimi found official documents showing the military’s role in establishing brothels, he is not optimistic about unearthing documents about the military’s abduction of women.

“There are things that are never written in official documents,” he said. “That they were forcibly recruited — that’s the kind of thing that would have never been written in the first place.”

John W. Dower, a historian of Japan at the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said Mr. Yoshimi’s “extremely impressive” work has “clarified the historical record in ways that people like Prime Minister Abe and those who support him refuse to acknowledge.”

MR. YOSHIMI grew up in Yamaguchi Prefecture in western Japan, in a household with fresh memories of the war. He traces his interest in history to a junior high school lecture on the nation’s American-written, pacifist Constitution and its guarantee of human rights. He was impressed that the Constitution “even had something to say about a kid like me in the countryside.”

After completing his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Tokyo, Mr. Yoshimi concentrated on Japan’s postwar democratization. It was while searching for documents related to Japan’s wartime use of poison gas in the Defense Agency’s library that he first stumbled upon proof of the military’s role in sexual slavery.

Mr. Yoshimi copied the document but did not publicize his finding. At the time, no former sex slave had gone public about her experiences, and awareness of wartime sex crimes against women was low. But in late 1991, former sex slaves in South Korea became the first to break their silence. When the Japanese government responded with denials, Mr. Yoshimi went back to the Defense Agency.

Of the half-dozen documents he discovered, the most damning was a notice written on March 4, 1938, by the adjutant to the chiefs of staff of the North China Area Army and Central China Expeditionary Force. Titled “Concerning the Recruitment of Women for Military Comfort Stations,” the notice said that “armies in the field will control the recruiting of women,” and that “this task will be performed in close cooperation with the military police or local police force of the area.”

In another document from July 1938, Naosaburo Okabe, chief of staff of the North China Area Army, wrote that rapes of local women by Japanese soldiers had deepened anti-Japanese sentiments and that setting up “facilities for sexual comfort as quickly as possible is of great importance.” Yet another, an April 1939 report by the headquarters of the 21st Army in Guangzhou, China, noted that the 21st Army directly supervised 850 women.

Mr. Yoshimi went public by telling Asahi Shimbun, a national daily newspaper. The attention led to years of harassment from the right wing, he said, including nightly phone calls.

These documents had survived because they had been moved 25 miles west of central Tokyo before the end of the war, Mr. Yoshimi said. The postwar American occupation forces had then confiscated the documents, eventually returning them to Japan in the 1950s.

DESPITE the government’s efforts to hide the past, Mr. Yoshimi succeeded in painting a detailed picture of Japan’s wartime sexual slavery: a system of military-run brothels that emerged in 1932 after Japan’s invasion of Manchuria, then grew with full-scale war against China in 1937 and expanded into most of Asia in the 1940s.

Between 50,000 and 200,000 women from Japan, Korea, Taiwan, China, the Philippines, Indonesia and elsewhere were tricked or coerced into sexual slavery, Mr. Yoshimi said. Thousands from Korea and Taiwan, Japanese colonies at the time, were dispatched aboard naval vessels to serve Japanese soldiers in battlefields elsewhere in Asia. Unlike other militaries that have used wartime brothels, the Japanese military was the “main actor,” Mr. Yoshimi said.

“The Japanese military itself newly built this system, took the initiative to create this system, maintained it and expanded it, and violated human rights as a result,” he said. “That’s a critical difference.”

Mr. Yoshimi said he was unsurprised by the most recent moves to deny the wartime sex slavery. He said they were simply the culmination of a long campaign by nationalist politicians who have succeeded in casting doubt, in Japan, on what is accepted as historical fact elsewhere.

In 1997, all seven government-approved junior high school textbooks contained passages about the former sex slaves. Now, as a result of the nationalists’ campaign, only two out of eight do.
“Mr. Abe and his allies led that campaign,” Mr. Yoshimi said, “and now they occupy the center of political p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