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December 28, 2006

강준만의 세상읽기 진보는 신영복을 다시 사색하라

강준만의 세상읽기 진보는 신영복을 다시 사색하라

그가 구체적 대안이나 ‘래디컬함’이 없다고 비판하는 건 옳은가…편가르기에 사로잡힌 진보 진영에 신뢰와 성찰의 필요를 역설하다

▣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과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신영복에 대한 오해가 만만치 않다. 신영복에 대한 일부 개혁·진보 인사들의 부정적·소극적 평가는 ‘진보’에 대한 편협한 정의와 상황·여건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건 아닌가 하는 문제 제기를 하고자 한다. <교수신문> 2006년 9월26일치에 실린 ‘탈이념 시대의 진보 신화’라는 기사에 소개된 익명의 평가 5개를 인용하겠다. 내용이 다소 중복되기도 하는 긴 인용이 되겠지만, 신영복에 대한 오해를 넘어서야 참된 진보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의 중요성을 감안해 꼼꼼하게 검토해주시기 바란다.

신뢰가 죽은 사회에서 진보는?

(평가 1) “신영복 교수는 진보가 아니다. 신 교수의 저작 내용이 현재 KTX 여승무원 문제, 한-미 FTA에 대한 ‘진보’ 입장과 크게 입장을 달리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에 대한 구체적 입장이나 답안이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누가 신 교수의 저작을 읽고 래디컬함으로 인한 위협을 느끼겠냐.”

(평가 2) “신영복 교수는 ‘진보적 상징’이라기보다는 ‘어른’이다. 그가 학계나 대중에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각박하고 경쟁 위주인 현실에서 한숨 돌리면서 사색할 수 있는 사색의 인도자, 지혜로운 어른 정도다. 그렇기에 그의 저작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다.”

(평가 3) “사실 신영복 교수의 학문적 연구성과라는 것은 사회과학적 맥락에서 보면 전혀 없지만 이는 신 교수가 살았던 시대, 한국 현대사가 만들어낸 우리 ‘지식인의 초상’이기 때문에 그런 시대를 살아낸 ‘어른’에 대한 경외감은 필요하다. 그러나 실제 ‘그러한 것’보다 신비화되는 측면은 있고 이는 경계할 부분이다.”

(평가 4) “신 교수의 이론을 실제 사회 대안으로서 적용하려면, 그래서 낮은 사람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도록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주장이자 사상들이다. 현실은 감옥 속의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나은 상황과 평균적 이해와 속성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복합적으로 얽힌 복잡한 사회인데, 선생님께서 감옥이라는 현실과 동질성이 떨어지는 곳에 오래 머물렀다는 점, 또 학교라는, 사회와는 다른 세계에 오래 있어서 현실적 대안과 구체적 답을 원하는 이들에게 적절한 답을 줄 수는 없다.”

(평가 5) “나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의 말씀이 조금씩 추상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고, 선생님의 ‘관계론’이 소통되는 방식은 좀 ‘존재론’적으로 느껴졌다고, 그래서 선생님의 사상이 ‘고통의 바깥자리’에서 교양의 한 자락으로 변모돼가는 것을 느꼈다고, 세상의 악한들에게도 열려 있는 선생님의 너른 품이 속 좁은 내게는 문득 안타깝기도 했다고, 나는 그렇게 고백하고 싶다.”

위에서도 지적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신영복에겐 ‘구체적 입장이나 답안’ ‘래디컬함으로 인한 위협’ ‘현실적 대안과 구체적 답’이 없다고 말한다. 나는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을 생각을 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한국의 지도층 인사나 엘리트 계급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는 늘 한 자릿수와 10%대를 오락가락한다. 진보건 보수건 민중은 ‘출세’한 그들을 믿지 않는 것이다. 공적 신뢰가 무너진 세상이다. 그런데 일부 진보파는 신영복에게 ‘구체적 입장이나 답안’ ‘래디컬함으로 인한 위협’이 없다고 불평한다.

신뢰가 죽은 사회에서 진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보수에게 타격을 입힐 대안을 강구하는 것인가? 민중이 믿지 않는데도 진보의 비전과 대안을 역설하는 사람이어야 하는가? 신뢰의 문제를 외면하고 벌이는 그런 ‘대안 노름’은 문자 그대로 사상누각(沙上樓閣)은 아닐까? 신영복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묻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신뢰받는 집단이 있습니까. 대학? 대학교수? 전혀 신뢰받지 못합니다. 문제가 있는 곳이면 어디 안 끼는 곳이 없어요. …정치권, 종교계, 법조계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신뢰집단이 되려고 하는 이들이 보이는 모습이 어떤 것이지요. 상대방을 흠집 내서 자신이 신뢰받으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엄청난 내부 소모를 겪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이끈단 말인가

진보파는 그런 ‘내부 소모’를 필요악으로 본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필승’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진보적 지식인의 역할은 그런 ‘필승’을 위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아우성친다. 물론 그 덕분에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탄생했다고 볼 수도 있으니, 그게 무조건 잘못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두 정권이 보인 한계에 대해 아무런 성찰도 없이 또 한 번 무조건 ‘필승’해야 한다고 외치는 모습이다.

‘신뢰’와 ‘성찰’의 미덕을 강조하는 신영복은 가급적 비판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신영복의 그런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건 ‘역할 분담’으로 이해하면 간단히 풀리는 문제다. 한 사람에게 모든 걸 기대하려는 ‘영웅 만들기’ 게임의 유혹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지금 정작 하려는 말은 그건 아니고, 그런 신영복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땐 행간의 의미를 읽는 게 필요하다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이다.

“1960년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굉장히 능력 있고 진보적인 친구들이 참 많았습니다. 제가 그들과 헤어져 감옥에 있는 동안 내내 그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참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출소한 직후에 제일 먼저 물어본 게 그 친구들의 근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 중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우가 하나도 없더군요. 다들 출세했더군요. 그 대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예전에 별 능력 없어 보였던 친구들, 사명감이 아니라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참여했던 이들, 그런 사람들이 남아 있더라고요. 제게는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이끌고 나가겠다’는 오만한 생각은 큰 잘못입니다.”

내 나름의 직설법으로 해석해보겠다. 신영복은 ‘진보의 사유화·이권화’를 지적한 것이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농민운동가 천규석의 독설을 빌리자면, “지나고 보니, 60~80년대까지의 그 풍성했던 민주화운동이란 것들도 잘난 놈들에게는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동시에 거두어갈 기회로 활용되었다.” 물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까지 훼손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그 민주화운동 세력이 2번 또는 3번의 집권을 했지만 민중에겐 큰 실망을 안겨준 게 분명한 이상, (평가 1)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래디컬함으로 인한 위협’이야말로 이미 현실 적합성을 잃어버린 옛날 이야기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진보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가 되었으며, 그 전제는 ‘성찰’과 ‘신뢰’라는 게 바로 신영복표 진보의 핵심이다. 누가 이 중요한 문제를 신영복만큼 일관되고 끈질기게 역설했는가?

신영복의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건 그가 “각박하고 경쟁 위주인 현실에서 한숨 돌리면서 사색할 수 있는 사색의 인도자, 지혜로운 어른 정도”로 여겨졌기 때문이란 (평가 2)의 지적은 옳다. 그러나 거기서 멈춰선 안 된다. 그 ‘사색’에 담겨 있는 진보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모색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진보를 ‘이끄는’ 입장에서만 말할 뿐 ‘이끌림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다. 상투적인 민중예찬과 실질적인 민중모독을 범하면서도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관계의 문제를 외면한 진보는 허구라는 게 신영복의 주장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사람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가장 절실한 아픔과 기쁨은 모두 사람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관대한 사람과 오만한 사람이라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관대한 사람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관대한 사람입니다. 오만한 사람들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오만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은 자신보다 강한 이들에게는 결코 오만하지 않습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관대한 사람인지 오만한 사람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보다 약한 이들,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우리 사회는 고집이 센 사회”

지금 신영복은 ‘오만한 진보’는 원초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보수’의 구도 이전에 ‘오만-관대’의 구도가 진보의 가치를 구현하는 데 더 적절하다는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진보’로 출세한 이들에게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눈물이 있는가? 공감과 눈물은 사회과학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무시해야 하는가? 진보의 ‘진영 강화’라는 명분을 앞세워 끼리끼리 뜯어먹는 데만 골몰했던 건 아닌가?

(평가 3)은 신영복의 학문적 연구성과라는 것은 사회과학적 맥락에서 보면 전혀 없다고 했는데, 그 이전에 학문이건 진보적 실천이건 그걸 지배하는 기존 사회과학의 틀을 의심해볼 수는 없을까? 그 사회과학이란 것도 수입품이거나 보세가공품 아닌가. 신영복이 이런 문제 제기를 직설적으로 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는 단지 ‘어른’에 대한 경외감으로만 그를 대해야 하는가? 오히려 ‘신비화’를 걱정할 필요조차 없이 ‘어른’에 대한 경외감을 아예 버리고, 신영복을 대담한 도발자로 보는 게 더 옳지 않을까?

신영복이 겪은 20년20일간의 감옥 생활이 갖는 한계를 지적한 (평가 4)에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발상의 전환일 것이다. 위 평가들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건 ‘전투적 일상에 매몰돼버린 진보’의 모습이다. 근본과 더불어 크게 보는 법을 놓쳐버린 타성의 정치일 수 있다. 신영복의 이론은 실제 사회 대안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대안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지적한 것으로 보는 게 옳다. 토대 없는 대안에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평가 5)는 “세상의 악한들에게도 열려 있는 선생님의 너른 품이 속 좁은 내게는 문득 안타깝기도 했다”고 고백했는데, 이는 “대립과 갈등만 있을 뿐,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라는 신영복의 고민을 비켜간 고백은 아닐까? ‘세상의 악한’을 무력하게 만들거나 소외시키는 게 진보일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건 불가능하건 그건 옳기 때문에 무조건 실천해야 할 그런 일인가?

그런 의문에 대해 신영복은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 이것은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쌓아온 역사의 결론”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 사회는 흔히 말하는 것처럼 ‘젊은 사회’가 아니라 ‘굉장히 나이 많은 사회’라고 했다.

“지난 세월 동안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아온 사회거든요.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를 지고 있는 나이 든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지요. 이렇게 나이 많은 사회라서 우리 사회는 무척 고집이 셉니다. 우리 사회가 처한 대립과 갈등의 문제를 풀어가려면 이런 전제, 즉 ‘우리 사회는 무척 고집이 센 사회다’라는 것을 먼저 수긍하는 태도가 우선 필요하다고 봅니다.”

위와 같은 진단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세상의 악한’에 대해 무조건 이기는 게 좋은지 그것도 다시 생각해보자는 게 신영복의 문제의식이다. 그는 “한쪽에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쪽에 어린 시절 강가에서 코피를 씻던 나처럼 좌절하는 사람도 있으니까”라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하지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도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노 정권 사람들 간의 이전투구를 보라

이런 말이 현실과 동떨어진, ‘고통의 바깥자리’에서 교양의 한 자락으로 변모돼가는 담론으로 여겨진다면, 정작 현실과 동떨어진 건 바로 그런 생각일 수 있다는 반론을 펴고 싶다. 민중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았던 노무현 정권은 한 자릿수 지지를 받는 ‘식물 정권’으로 전락한 가운데 민중은 노 정권에 대한 환멸과 반감을 한나라당과 ‘박정희 신드롬’을 껴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과연 민중이 생각하는 ‘세상의 악한’은 누구인가?

신영복은 ‘승자 독식주의’ 진보를 공격한 것이며, 그 내용은 너무도 현실적이다. ‘편 가르기’와 ‘적에 대한 증오’ 등과 같은 진영 의식에 사로잡혀 늘 ‘남 탓’만 하면서 외쳐대는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는 그의 메시지가 현실적이지 않으면 무엇이 현실적이란 말인가? 문제는 너무도 현실적인 이야기를 ‘교양’으로만 간주하거나 소비하려 든 우리 모두에게 있는 건 아닐까? 한때 피를 나눈 형제 이상으로 끈끈하게 보였던 노 정권 사람들 간의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보라. 늘 사람을 강조해온 신영복에게 ‘사람 얘기’를 너무 많이 한다는 비판이야말로 비현실적인 게 아니었을까? 지금 우리는 신영복을 제대로 ‘소비’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http://h21.hani.co.kr/section-021128000/2006/12/021128000200612280641043.html

Friday, December 22, 2006

MLB의 이유있는 일본선수 사랑

마쓰자카·이가와 영입…내년 20명 뛸듯
관중·중계권료 급증 등 구단수익 ‘쏠쏠’

2005년 4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시애틀 매리너스에 대한 분석기사를 내놨다. 당시 시애틀은 5년 동안 연평균 1억6300만달러(약 1514억원)를 벌어들이고 있었다. <포브스>지는 시애틀의 성공이 일본에서 수입한 스즈키 이치로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포브스>지에 따르면, 시애틀은 이치로 영입 첫 해(2001년) 입장관중수가 12% 증가하여 14개 아메리칸리그 구단들 중 경기당 평균관중 1위(4만3300명)를 차지했다. 1년전 시애틀의 평균 관중은 아메리칸리그 4위(3만5983명)였다.

‘이치로 효과’는 더 있었다. 텔레비전 중계권료가 폭등해 시애틀은 2000년 <폭스티브이>와 10년 2억5000만달러의 계약을 했다. 메이저리그는 중계권 수익(엠엘비아이 인터넷 중계권료는 제외)이 그대로 구단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투어상품도 개발돼 시애틀 구장 앞에는 ‘수병(水兵)’(영어로 매리너)이라고 적혀진 티셔츠를 입은 일본인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포브스> 조사결과에 따르면 시애틀 상품판매 매출의 10%를 일본인이 책임진다고 한다.

구단 수익과는 별도로 이치로가 경기에서 잘 치고 잘 달려 구단 성적에까지 도움을 주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시애틀은 이치로를 데려오기 위해 일본 소속팀이었던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1312만5000달러(당시 150억원)를 이적료로 지불했으나, 이 금액은 2001년 절반이 지나기도 전에 다른 수익원으로 전부 회수됐다.

시애틀의 성공에 고무된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눈은 점차 일본으로 향했다. 뉴욕 양키스도 이미 2003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4번타자 마쓰이 히데키를 데려오면서 관중동원 1위, 중계권료 폭등 효과를 경험했다. 올해 겨울 보스턴 레드삭스가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몸값으로 5111만1111달러(475억원)를 써내고, 뉴욕 양키스가 좌완 이가와 게이를 영입하기 위해 2600만194달러(242억원)를 한신 타이거스에 지불한 것도 이런 이유로 설명될 수 있다. 특히 입찰액으로 써낸 돈은 사치세 부과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메이저리그 부자구단은 ‘거품’ 논란에도 마음대로 일본선수 쇼핑에 나설 수 있다. 어차피 투자한 돈은 몇 년 안돼 고스란히 회수된다.

올해만 해도 지금까지 5명의 일본인 선수들이 메이저리그 구단에 입단해 내년 시즌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할 일본인 선수는 20명으로 늘었다. 숙명의 라이벌 구단에서 선발맞대결을 펼치는 마쓰자카-이가와의 ‘투투’ 대결, 일본내에서 한번도 맞대결을 펼쳐본 적이 없는 마쓰자카-이치로의 ‘투타’ 대결 등은 야구를 민족혼으로 보는 일본 야구팬들의 관심을 최대한 끌어모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본인의 ‘관심’은 곧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수입’으로 직결될 것이다. 미국내 수익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해외에서 찾은 또다른 돈주머니가 바로 ‘일본인 선수’다. 그들이 실력까지 겸비했으니 두말 하면 잔소리다.

일 수단의 ‘선수 팔기’ 돈은 되지만…

1995년 일본 프로야구계는 발칵 뒤집혔다. 자유계약 권리가 없는 27살의 젊은 투수인 노모 히데오가 긴테쓰 버펄로스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덜컥 메이저리그 엘에이 다저스로 입단했기 때문이다. 1964년 스무살의 무라카미 마사노리가 아시아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을 때와 같은 파장을 불러왔다. 당시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임대 형식으로 나가있던 무라카미와 정식계약하려하자 무라카미를 반강제 귀국시킨 뒤 이후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봉쇄했다. 하지만 1995년은 시대가 달라져 있었다. 폐쇄주의는 더이상 통하지 않았다. 실리를 택한 일본은 금전적 보상을 받을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가슴앓이가 계속되던 1997년 말, 기어이 사건은 터졌다. 일본 지바 롯데는 이라부 히데키를 메이저리그로 보내면서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에만 단독협상권을 줬고, 이는 이라부에 눈독들이던 다른 몇몇 구단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결국 일본 프로 구단과 메이저리그는 이듬해 제도 도입에 합의했다. 일본 구단에 건네주는 이적료로 최고액을 써낸 메이저리그 구단에 독점교섭권을 주는, ‘포스팅 시스템’은 이렇게 탄생했다. 노모에서 시작된, 더 앞서서는 무라카미로부터 초래된 분쟁이 이라부로 인해 제도화한 셈이다.

1998년 제도확립 후 지금껏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미국으로 건너간 일본 선수는 2000년 스즈키 이치로(시애틀 매리너스)를 비롯해 8명이다. 메이저리그가 이들을 위해 일본 구단에 쓴 돈은 1억704만6305달러(993억원)가 넘는다. 겉보기에 일본은 선수팔기로 남는 장사를 했다. 하지만 스타들의 해외진출로 하락된 국내 프로 야구인기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었다.김양희 기자

Thursday, December 21, 2006

잠, 6시간 미만이면 위험 [조인스]

잠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시간 기근시대다. 사회ㆍ직업적 책임이 시간을 점령해 버린 탓에 인체가 요구하는 수면에 넉넉한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수면 ‘채무’는 곧 운전중 교통사고, 직장 내 안전사고, 일처리 능력 저하, 생산성 감소로 이어진다. 또 잠이 모자라면 온갖 궤양, 심장병, 비만, 우울증과 더불어 노화를 촉진하는 질환에 걸려들 위험도 커진다.

잠은 몸과 마음을 충전한다. 수면이 부족하면 신체와 정신이 오작동하고 움직임 자체가 멈출 수도 있다.

잠을 1~1.5시간 덜 자면 다음날 업무능력이 3분의 1이나 감소된다. 적정 수면시간은 성인 8시간, 청소년 9~10시간, 어린이 9~11시간, 아기 15시간이다.

개인 차는 있되 6시간 미만으로 자면 즉각 업무 수행력이 떨어지고 건강이 손상되며 사망위험이 상승한다.

키가 작은 어린이와 청소년이 자는 시간은 10세 이상 8.49시간, 11~13세 7.89시간, 14세 7.39시간, 15세 7.09시간, 16세 6.78시간, 17세 6.3시간, 18세 5.49시간, 19세 5시간 등이다. 성장기에 필요한 수면 시간보다 적게는 2시간, 많게는 3시간 이상 적게 자는 셈이다.

휴일에 실컷 자 보면 어느 정도 자야 피로가 풀리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의 적정 수면시간 측정법이다. 자고 나서 개운하고 머리가 맑으며 기분이 좋으면 제대로 잔 것이다.

매일 자고 일어나는 시간을 지켜야 한다. 휴일이라도 이 기준에서 2시간 이상 벗어나면 안 된다. 잠자기 3~6시간 전에는 카페인, 니코틴, 알코올 섭취를 피한다. 숙면을 방해할 수 있다.

잠들기 3시간 전 과식도 금물이며, 2~3시간 전에 일손을 놓아야 옳다. 잠자리에서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잠드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한 TV나 비디오도 보지 않는다.

운동을 하루 30분쯤 하되 수면 3시간 전에는 피한다. 따뜻한 우유나 허브차 또는 카페인이 들지 않은 차를 마신다. 체온을 올려 잠드는 데 도움을 준다.

바나나, 땅콩 버터 등 트립토판이 많이 든 음식을 조금 먹어도 좋다. 진정효과를 지닌 자연성분이다. 멜라토닌은 불면을 유발할 수 있다.

귀가해서 선잠을 자지 않아야 한다. 밤잠 자기가 어려워진다. 20분 안에 잠들지 못하면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나 잠시 책을 읽는다. 마사지, 명상, 음악, 요가, 긍정적 상상, 바이오 피드백, 온수 목욕도 머리를 푸는 데 이롭다.

조용하고 어둡고 서늘한 상태로 침실을 유지한다. 양말을 신어도 좋다. 발톱이 따뜻해지면 잠이 잘 온다. 잠만 잘 자도 건강, 부(富),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서울=뉴시스】

Friday, December 01, 2006

익명의 뉴스인물 뒤 캐 사이버 ‘댓글 폭력’ (한겨레)

익명의 뉴스인물 뒤 캐 사이버 ‘댓글 폭력’
포르노 찍은 영어강사·폭력 연루 연예인 등 신상 공개


» 영어강사 김씨 정보 댓글로 유출된 과정


회사원 이아무개(28)씨는 지난달 30일 ‘뉴스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기 위해’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댓글을 계속 지켜봤다. 뉴스는 영어학원 강사 김아무개씨가 외국에서 포르노 배우로 활동한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는 내용이었다. 3시간 남짓 공을 들여 이씨는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씨는 곧 메신저로 ‘성과물’을 주위 동료들에게 나눠줬다. 그는 “호기심 생기는 뉴스가 있으면 댓글을 주목해 관련 정보를 쉽게 얻는다”며 “이번에도 ‘혹시나’ 하면서 기다렸는데 ‘역시나’였다”고 말했다.
인터넷 공간에서 댓글을 이용해 개인의 신상정보가 마구 유포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최근엔 관련 뉴스 댓글이나 실시간 검색어 등을 통해 즉각 노출되면서, 그 속도도 한층 빨라졌다.

올해 초 부산에서 폭행사건에 연루된 유명 가수를 즉각 찾아낸 것도 댓글이었다. 뉴스가 나오자마자 누리꾼들은 그날 현지에서 열린 콘서트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이니셜 등을 대조해 가수가 누구인지 밝혀냈다. 댓글로 밝혀진 ‘사실’은 블로그, 카페 등을 통해 삽시간에 퍼졌다. 실시간 검색어는 여기에 가속도를 붙인다. 최근 화제가 된 ‘사포녀’(까칠하다는 의미)의 경우, 한 여성이 다른 누리꾼과 주고받은 쪽지가 우연히 공개돼 ‘사포녀’라는 별명을 달고 유포됐다. 결국 인기검색어에 오른 ‘사포녀’는 개인 미니홈피에 사과문까지 올려야 했다.

포털사이트들은 이러한 사이버 폭력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네이버의 채선주 홍보실장은 “300명 이상의 인력을 동원해 명예훼손이나 개인정보 침해가 우려되는 뉴스에 대해 댓글 작성을 제한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기 일쑤다.

영어강사 김씨의 경우 주요 포털사이트에서 이날 저녁쯤 댓글 게시판을 폐쇄했지만 이미 정보는 다 퍼진 뒤였다. 한 포털사이트 관계자는 “누리꾼들이 댓글을 올리는 속도가 지우는 속도보다 빨라, 다 막는 것은 무리”라고 밝혔다.

김씨를 수사한 경찰은 “학원 소재지 등 관련 정보를 비틀어 언론에 전했는데도 개인정보가 알려져 당혹스럽다”고 했다. 김씨가 일하던 학원까지도 애꿎은 피해를 보고 있다. 경찰은 1일 각 포털사이트와 동영상 사이트 19곳에 관련 글, 영상물 삭제를 요청했다.

김씨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1년 이하의 징역 혹은 1천만원 이하의 벌금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신의 사진과 영상물이 알려지는 가혹한 ‘사회적 형벌’을 받았다.

1일 오후 3시 현재 아직도 ‘캐나다 영어강사’는 네이버 인기검색어 2위를 달리고 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이번엔 `강사녀` … 또 사이버 테러 [중앙일보]

이번엔 `강사녀` … 또 사이버 테러 [중앙일보]

유학 시절 포르노 출연 영어강사 입건
네티즌들 신상 공개 … 동영상도 퍼져 유학 시절 포르노 영화에 출연한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한 여성의 사진과 홈페이지 주소 등 개인 정보가 네티즌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인권침해 우려를 낳고 있다.

서울 종로구 J영어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는 김모(33)씨는 캐나다 유학 당시인 지난해 2월부터 9월까지 편당 200~300달러를 받고 30여 편의 포르노에 출연한 혐의(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로 불구속 입건됐다. 김씨는 자신이 강의하는 학원에 다니던 한 네티즌의 제보로 포르노 촬영 사실이 드러났다.

문제는 관련 사실이 기사화되면서 김씨가 재학 중인 학교와 실명, 개인 홈페이지 등 지극히 개인적인 정보까지 '강사녀'란 제목이 붙어 인터넷 게시판에 노출되고 있다는 것.

인터넷 게시판에는 욕설은 물론 김씨가 출연하는 동영상 보는 법과 사진 검색 방법까지 다양한 댓글이 달렸다.

김씨가 출연한 포르노 영화의 동영상과 사진 등도 각종 P2P 사이트를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인터넷 게시판 댓글을 통해 알려진 그의 개인 홈페이지에는 수천 명의 네티즌이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의 개인 정보가 공개되면서 네티즌 사이에서는 '또 인터넷 마녀재판이 이뤄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인터넷을 통해 특정인의 개인 정보가 노출되고 일부 네티즌의 비방 대상이 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하철에서 애완견의 배설물을 치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부 네티즌의 표적이 된 이른바 '개똥녀 사건'과 서울대 도서관에서 개인적인 다툼을 벌인 당사자의 사진.실명 등 개인 정보가 인터넷에 돌아다닌 '서울대 도서관 사건'이 대표적이다.

김형준 변호사는 "댓글을 통해 지나친 개인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명예훼손 우려가 있다"며 "국내에서 불허하고 있는 포르노 출연 혐의로 경찰의 처벌을 받은 만큼 악성 댓글에 의해 김씨의 사생활이 파헤쳐지는 것은 이중처벌을 받는 셈"이라고 말했다. 네티즌 이정원씨는 "일부 네티즌은 정말 집요하다"며 "자신들이 지은 죄가 그렇게 다 까발려지면 어떤 기분일지 역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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